당신이 현실을 묻는다면 모른다고 말할 것이다.
난 단 한 번도 당신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어. 그만큼 나에게 있어서 당신은 절대적인 존재였지. 예전에도 잠깐 언급한 적 있었지만 당신이 시내버스에서 파는 손목시계를 나에게 건네주며 “이것은 원자력으로 가는 시계야!” 라고 했을 때도, 난 당신의 말이었기에 의심하지 않았어. 어쩌면 나는 사람의 말을 있는 그대로 잘 듣는 편일지 몰라. 하지만 이젠 그럴 수도 그러지도 못해. 모든 사물을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내 모습이 현실에선 전혀 낯설지 않거든. 간혹 나만의 모습이라기 보단 사회적 현상의 단편일지도 모른다 생각해. 이런 현상이 꽤 오래도록 지속되는 기분은 나만의 것일까! 아니면 지금의 내가 “생각의 소음”을 편안하게 받아들여야만 현대인의 일상 속에 표류하는 존재로 인식하게 되기 때문일까. 생각해보면 “너”라는 “생각의 소음”은 단순히 현대인의 삶과 같이 공존한 사회적인 현상은 아닐 거야. 봄의 미세먼지가 모든 미디어를 흔들어 대도 우리는 항상 알고 있었어. 이것도 금방 지나갈 거란 것을. 하지만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너는 “결”이 다르게 우리 내부의 한편에 항상 있었지. 그것은 마치 현대인의 질병 같아. 전염병처럼 우리의 삶을 잠식시키지. 때론 현실 그대로의 모습이 아닌 변형된 혹은 다른 존재가 되기도 해. 그렇게 넌 우리 곁의 삶에 기생하며 평소의 모습을 유지할 거야. 사실 넌 전염병도 질병도 아니야. 네가 나의 현실에 같이 공존하게 된 지금, 불안전하지만 가끔은 흥미롭게도 해. 그래서일까. 현실의 나는 사유의 숲에 갇혀 길을 잃을 때가 많아. 그래도 난 항상 너와 같이 숨을 쉴 때, 비록 익숙한 풍경이 아니어도 괜찮다 생각했어. 어디든 상관없이 가까이 다가갈수록 수많은 겹을 가진 또 다른 네가 나를 마중 나올지라도, 그렇게 나와의 간격을 좁히며 긴장감을 높이고, 나의 모습이 어느 위치에 있는지 가늠조차 할 수 없더라도, 그렇게 먹먹히 서서, 의심과 부정의 시선으로 너를 마주하면 할수록, 진실을 의심하게 되고, 자기주장을 강하게 역설하는 원인이 되겠지. 얼마 전에 만난 화가의 이야기를 듣고 현실에 갇힌 자아 덩어리를 상상했어. 근데, 자아라는 단어의 표현은 왠지 항상 어둡게 느껴져. 그래도 작업실의 분위기와 작업에서 드러나는 기운은 외로운 사고를 가진 자아가 세련된 형식의 붓질을 미묘하게 하더군. 마치 현재에 보여지는 외적 형상이 아닌, 내적 현실감의 무게를 무심히 대처하려는 재치에 가까워 보였어. 어쨌든 그렇게 표현된 화가의 몸짓과 시선은 나에겐 별 의미 없게 다가왔어. 단지 화가의 즐거운 상상을 몰래 훔쳐보는 기분이랄까. 난 화가의 이야기를 듣는 중에 문득 웃긴 생각이 났어. 그가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는 그 무엇이 있다는 거야. 나는 언제쯤 나를 자랑스럽다 생각했을까. 아마도 2002년 축구경기를 보는 동안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했었던 것 같아. 그 당시엔 독일에 머물고 있을 때여서 더 그랬었는지 몰라. 그리고 시간이 흘러 자랑스러움에 대한 나의 태도를 견제하기에 이르렀지. 세련된 문화의 삶과 스스로를 자랑스럽다 여기는 태도를 같은 선상위에 놓는 소행마저 촌스러운 것이라 느꼈거든. 그 이유가 뭔지 알 수 없지만 말이야. 그렇게 십 여 년을 보내던 어느 해, 수많은 이들에게 “좌절”이라는 단어가 전혀 낯설지 않았던 그 해, 그 덕분이라고 말해야 하나. 2002년에 광장문화를 직접 경험하지 못한 아쉬움을 “좌절”과 함께 경험하게 되었어. 자발적인 공동체의 형성과 대치되는 힘의 균형이 나의 존재를 각인시켜 주었어. 비록 이 두 경험의 근원적인 측면이 같을 수 없지만, 각양각색의 존재감들이 보여준 광장의 한 장면을 뭐라 표현할 수 있을까. 지금도 나는 불안한 현실과 다양한 사유의 불신에서 기인한 사회구조에 살고 있어. 하지만 난 “인간의 조건”을 다시금 생각하고 싶어. “오직 우리가 행하는 것을 사유하겠다.” 라는 누군가의 말이 요즘 자주 떠오르는 이유가 이와 무관하진 않겠지. 간혹 정치인들의 말을 듣다보면 동물농장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될 때도 간혹 있지만. 어쨌든 다시 한 번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는 예술가들의 욕망에 지금 주목해야한다고 생각해. 상대적으로 많은 예술가들이 현실의 이면에 더 관심을 갖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인 것 같아. 그 이면이, 현실의 전반적인 면을 대변할 수 없지만, 이면의 현실에 상대적으로 많은 문화인들이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미디어를 통한 정보에 지쳤고, 신뢰를 잃어버린 사회구조의 현실을 다시 보려는 거겠지. 난 이런 예술가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생각해. 근래엔 그마저도 소용없어진 것 같지만. 예술과 현실정치 참 어렵지. 그냥 내 머릿속을 헤집어 놓은 기분. 사실 난 현실의 이면 보다 표면에 관심이 더 많거든. 난 표면과 이면이 어떻게 공생하고 구성되고 있는지 잘 몰라. 현실의 난, 이전의 내 모습도 미래의 나도 아니더라구. 지금 여기에 서 있는 나로부터의 그림자, 거기까지의 거리와 면적이 내 현실이겠지. 하지만 난 부정할거야.
강석호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