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철의 무위 혹은 카오스모제(chaosmose)-혼돈과 질서의 상호 침투
김찬동 Chandong Kim | 전시 기획·미술 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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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철의 작업은 도전적이다. 역설적으로 그는 그리지 않기 위해 그린다. 그는 그린다는 작위와 관습적 행위에 맞서 구도자처럼 또 다른 그리는 행위를 수행한다. 화가들은 대부분 잘 그리기 위해 작업한다. 잘 그린다는 것은 무엇일까? 대상을 잘 묘사하는 일인가? 아니면 대상에 대한 작가의 느낌이나 감성을 잘 표현하는 일인가? 잘 그린다는 것은 미술의 역사가 구축해 온 중요한 가치이다. 하지만 그는 그런 지고의 가치를 외면하고 잘 그리지 않기 위해 골몰한다. 대상을 잘 묘사하고 재현하는 일은 이미 사진기의 발명과 함께 포기된 지 오래다. 작가의 내적 감성을 잘 표출하는 일도 표현주의나 추상표현주의를 통해 그 가치를 충분히 획득하였다. 하지만 작가들은 여전히 잘 묘사하고 표현하려 한다.
그리는 것과 관련된 회화의 기본 담론들은 20세기를 거치며 미술의 본질에 관한 질문을 놓고 씨름했다. 캔버스 위에 잘 그려진 형상은 아무리 잘 그려진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의 허상일 뿐이며, 작가의 감성을 아무리 잘 표현했다 해도 그것은 남겨진 물감 자국에 지나지 않는다. 이 역시 물질적 차원의 흔적일 뿐, 감성의 실체와는 무관한 허상이라는 인식에 도달했다. 결국 그리는 것으로서의 회화의 본질은 ‘사물로서의 평면성’이란 결론에 도달하였다. 결국 그리는 작위적 행위를 최소화한 미니멀리즘은 철저히 물질적 속성으로서의 작품의 본질을 규명한 듯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고 물감으로 덮인 평면을 구현하더라도 평면은 무언가의 이미지를 담고 있는 실체의 2차원적 반영이라는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 이러한 문제를 끝까지 밀고 나간 작가들은 기계가 다듬어 낸 것과 같은 무표정한 3차원의 기하학적 구조물을 통해 순수한 입방체로서의 사물인 실체를 얻어내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이 실체를 작품이라기보다는 ‘특별한 사물(specific object)’이라 칭했다.
최상철은 이러한 현대미술 담론의 생성기에 한국화단에 소위 ‘기하학적 추상’이 유행하던 시절, 작가로 등단하였다. 기하학적 추상은 기존의 양식인 추상표현주의적 에너지가 소진되고 그것이 그저 공허한 양식으로 변모해 갈 때, 신진 작가들에 의해 새로운 양식으로 시작되었다. 선과 색, 그리고 기하학적 도형으로 구성된 추상화된 조형은 감성적 표현보다는 상대적으로 이지적인 작업이었다. 서구 ‘하드 에지(hard-edge)’의 영향과 변용으로 화단은 대부분 기하학적 추상의 새로운 양식이 유행했다. 화면에 정확한 기하학적 선과 면을 구현하기 위해 마스킹 테이프를 이용한 테이핑 작업이 보편화되었다. 디자이너들이 사용하던 이 기법은 정교한 기하학적 선과 면을 얻어낼 수 있기에 작가들은 너도나도 이를 선호했다. 하지만 1970년대 중반, 일본의 모노하(物派)의 유입과 도쿄화랑의 초대전으로 열렸던 < 한국 5인의 작가 다섯 가지의 흰색 >전(1975)의 성과로 한국화단은 흰색 경향의 단색화 담론이 주류로 형성되었다. 단색화나 모노하가 의존했던 노장사상이나 ‘지각의 현상학’ 등이 작가들을 사로잡았다. 그들은 작품을 통해 주체에 의해 대상화된 사물이나 객체를 원래의 자연 상태로 회복하는 일에 몰두하였다. 아무것도 그리지 않고, 단색조의 물감으로 캔버스에 반복행위를 가함으로써, 물질을 정신적인 차원으로 승화시키고자 하는 시도가 유행하였다. 흰색이 가진 ‘백의민족의 얼’로서의 상징성까지 결부시켜 서구의 미니멀리즘과 차별화된 ‘한국적 미니멀’을 구축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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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철의 작업은 피상적으로 단색화의 어법과 유사해 보인다. 검은색을 주조로 한 그의 작업은 양식적으로 단색화를 닮아있고 인위보다는 무위의 세계를, 자아를 비우는 명상의 세계를 추구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단색화 작가들은 작품의 작위성을 최소화하기 위해, 단일한 색 또는 유사한 색을 고집한다. 또한 화면 구성 방식 역시 유사한 행위와 행위의 패턴을 반복한다. 같은 행위의 반복은 의식에서 벗어나 무아지경에 이르게 되고 결과적으로 그렇게 구축된 화면은 자연에 가까운 정신적 존재가 된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단색화는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정신성을 내포한 독특한 사물이 된다는 논리이다. 하지만 단색화뿐만 아니라 모든 작업은 작가의 정신성이 투사된 독특한 사물이 아닌가? 단색화의 경우 반복적 무념무상의 행위를 통해 무(無)와 공(空)의 자연의 상태에 도달하고자 한다. 하지만 작업을 진행할 때, 이미 몸이 체득하고 인지한 형태나 질감, 색의 상태를 지각하며, 작업을 마칠 때 역시, 감각적으로 만족한 지점에서 끝내게 된다. 결과적으로 단색화 작가들은 무작위를 원하지만, 이미 교육되고 몸이 체득한 조형적 지각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무작위를 추구하고자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작위를 행하는 셈이다. 게다가 백색이 상징하는 ‘한민족의 얼’과 같은 민족 정서를 결부시키는 난센스를 보인다. 단색화의 무작위나 자연 상태는 그저 하나의 관념에 불과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최상철의 작업이 가진 특질은 단색화와 궤를 달리하는 그 자신만의 독특한 사유와 기법에 있다. 창작 과정의 작위성을 철저히 배제하기 위해 그는 독자적인 도구와 기법을 사용한다. 그의 대표적인 기법은 ‘우연’의 활용이다. 우연은 서구의 다다이스트나 초현실주의자들이 합리적인 모더니즘을 해체하기 위해 사용한 대표적 전략이지만, 최상철의 우연은 그것들과는 다르다. 그것은 데페이즈망(dépaysement)이나 언어유희(pun)와는 달리, 심층적인 규칙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우연과 규칙이란 서로 모순되거나 상충하는 개념일 수 있지만, 그의 작품이 가지는 또 다른 특질은 이 모순 상충을 절묘하게 조화시켜 내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작업을 위해 붓이나 연필 등 직접적인 화구뿐만 아니라 캔버스에 적절히 물감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 다양한 도구를 개발, 사용한다. 고무 패킹, 작고 둥근 돌멩이, 철사, 끈 등등이 그것이다. 그는 이 독특한 도구들을 사용하여 캔버스나 종이에 물감의 흔적을 남긴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 제작 과정을 살피면 다음과 같다.
우선 흰 점이 찍힌 고무 패킹과 검은 물감에 적신 돌의 사용이다. 고무 패킹을 캔버스에 무작위로 던져 그것이 떨어진 지점으로부터 돌을 굴려 흔적을 기록하는 것인데, 돌이 구르는 기점은 고무 패킹에 표시된 점의 위치로부터 비롯된다. 매번 돌을 굴릴 때마다 무작위로 패킹을 던져 출발점을 결정하는 것이다. 물론 작가는 돌이 굴러갈 수 있도록 캔버스에 일정한 기울기를 유지할 뿐이다. 이 작업 과정으로는 작위적인 흔적을 만들어 내기는 불가능하다. 때에 따라서는 물감이 묻은 꼿꼿한 철사를 패킹이 떨어진 지점에 수직으로 세웠다가 자연스럽게 손을 놓아 캔버스에 쓰러진 철사에 묻은 물감의 흔적이 남도록 한다. 철사는 특정 방향에 대해 작위를 가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쓰러지도록 한다. 또한 물감을 묻힌 일정한 길이의 끈을 무작위로 던져 캔버스에 떨어진 그 흔적을 작품화하기도 한다. 그뿐만 아니라 물감이 묻은 손으로 사물을 포장하면서 그 과정에서 포장지에 남겨진 물감의 흔적을 작품화한다든지, 물감이 묻은 손으로 흰 캔버스 천을 틀에 묶는 과정에서 캔버스 천에 결과적으로 남겨진 손자국들을 작품화하기도 한다. 이 과정 역시 작위성은 철저히 배제된다. 그는 또한 물감이 묻은 붓을 일정한 높이에서 캔버스에 우연의 법칙에 의거 떨어뜨려 생긴 붓 자국을 작품화하기도 한다. 그중에서도 그가 가장 즐겨 사용하는 작업은 물감에 담갔던 작고 동그란 돌멩이를 캔버스 위에 굴려 그 흔적을 작품화하는 것인데, 완전한 구가 아닌 이 돌멩이의 구르는 방식은 예측불허이다. 돌멩이를 캔버스 밖으로 굴러 나가게 하는 방식과 캔버스 외곽에 작은 벽을 구축하여 구르는 돌을 마치 당구공이 당구대에 닿아 굴절되듯 돌이 벽에 부딪혀 자유롭게 움직이도록 한 후 그 흔적을 작품화하는 방식을 사용한다. 작가는 돌이 지속해서 구르도록 캔버스에 적당한 경사를 줄 뿐이다. 그는 단색화의 작가들처럼, 그려진 흔적이 조형적 만족 상태에 이를 때 작업을 끝내지 않는다. 그 인위성을 제거하기 위해 그가 작품을 끝내는 순간은 1천 번의 행위가 끝날 때이다. 예컨대 작품에 사용되는 돌을 1천 번 굴리는 것이다. 1,000은 작가에겐 완전 수를 상징한다. 그의 작품에 남겨진 흔적은 1천 번 행위의 흔적인 셈이다. 그럴 뿐만 아니라 돌이 움직임을 시작하는 지점이나 방향을 결정하는 것도 좌우가 표시된 작은 죽편(竹片)을 주사위처럼 던지거나, 출발점을 결정하기 위한 특별한 제비뽑기 도구를 사용하는 무작위의 방식을 활용한다. 이는 어찌 보면 게임과 같은 즐거움과 정신적 수련을 함께 내포하고 있는 제작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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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老子)는 무위(無爲)를 자연이라 했다. 최상철이 작업 과정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것은 자연 상태의 작품이다. 그것은 작위가 배제된 순수한 무의 상태이다. 그는 회화 이전의 순수한 상태를 ‘무물(無物)’이라 하고 이를 추구한다. ‘무물’을 혼돈(混沌)의 상태라고 한다. 아무것도 규정되지 않은 순수한 무(無)의 상태, 공(空)의 상태가 그것이다. 세상의 본질은 혼돈인가 아니면 질서인가? 규정할 수 없는 암흑의 존재인가 아니면 이성의 빛에 의해 규명된 광명의 존재인가? 암흑 속에 담긴 질서인가? 아니면 질서처럼 보이는 거대한 혼돈인가? 이는 근원적인 질문이다. 최상철은 작품을 통해 이 근본적인 질문에 맞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화면에 드러나는 검은색은 무수한 흔적 들이 겹쳐 이루어진 것이다. 무수한 점과 선의 레이어를 가지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화면을 지배하는 검은 색은 단순한 블랙이 아니라 깊은 혼돈을 의미하는 우주의 검은색(玄)이다. 그는 어쩌면 거대한 원형 상태의 혼돈 속에 내재된 자연의 질서를 구도자처럼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철학자 질 들뢰즈(Gilles Deleuze)와 『천 개의 고원』(1980)을 함께 집필한 정신분석학자 카타리(Pierre-Félix Guattari)는 카오스와 코스모스를 합성한 ‘카오스모제(chaosmose)’란 조어를 만들어 냈다. 넓게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대안으로 제시된 개념인데, 그에게 카오스는 무질서, 불확실성, 창조적 잠재력을 상징하고, 코스모스는 질서, 구조, 조화를 상징한다. 하지만 카오스와 코스모스는 서로 이질적인 대립 관계라기보다는 상호보완적인 기능을 한다. 카오스모제는 이 두 요소를 통합하여 새로운 질서와 창조를 이루는 과정을 설명한다. 특히 예술은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상호작용하는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다. 카오스모제는 생태학적, 사회적, 정신적 차원을 통합하는 패러다임을 제안한다. 문명은 코스모스를 지향해 왔지만, 여전히 우리의 삶은 카오스의 상태인데 이 둘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자 하는 고심의 결과물이다. 그는 서구의 이분법적 사유보다는 도교나 불교적 사유에 의거 문제를 풀고자 한다. 사물이나 주체는 불변의 존재가 아니라 도(道)나 공(空)의 세계처럼 끊임없이 변화하는 존재이며, 또한 화엄경의 ‘연기(緣起)’ 개념처럼 모든 존재가 상호 의존적이라 인식한다. 도는 우주의 근본 원리로서, 모든 존재와 현상을 포함하고 조화시키는 개념이며 도는 혼돈 속에서도 질서를 찾아내고, 변화를 통해 새로운 균형을 이루는 원리이다. 무위는 ‘행하지 않음’ 또는 ‘자연스러움’을 의미하며, 인위적인 개입 없이 자연스럽게 우주의 흐름에 따르는 것을 강조한다. 이는 카오스모제의 자발적이고 창조적인 과정과 유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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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철의 작품은 철저히 인위나 작위를 배제하고자 한다. 단색화처럼 보이는 그의 화면은 작위적인 반복성으로 지고의 정신세계를 추구하려는 기존의 단색화 담론과 구별된다. 또한 있는 그대로 사물과의 교감을 꾀하는 모노하(物派)와의 그것과도 다르다. 그는 작업을 통해 카오스모제를 추구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물론, 그의 작품엔 사회적 문제를 직설적으로 다루지는 않는다. 그것 너머에 있는 근원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에는 고정된 실체나 영원한 진리가 개입될 여지가 없다. 존재의 변화와 유동성을 강조한다. 모든 존재는 서로 연결되어 있고,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인위적인 개입보다 자연스러운 흐름과 조화를 중시한다. 원래의 본질인 카오스를 구하되 카오스 내에 존재하는 자연이란 코스모스를 추구하는 것이다.
『장자(莊子)』 내편(內篇), 응제왕(應帝王)에는 ‘혼돈칠규(混沌七竅)’란 우화가 소개된다. 몸에 아무런 구멍도 없는 혼돈이란 생물체에 숨을 쉴 수 있도록 7개의 구멍을 뚫어주었더니 바로 죽고 말았다는 이야기이다. 자연에 자신들의 규칙과 사유를 투사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일깨우는 이야기이다. 최상철의 작품은 죽은 혼돈에 뚫어 놓았던 구멍들을 메꾸어 혼돈으로 하여금 내적 자연 원리에 의해 생명 활동을 회복하게 하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가 그리지 않는 역설적 그림을 그리고자 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 아닐까? 인위를 철저히 배제하며 자연적 흐름에 맡길 때, 얻게 될 무물로서의 예술세계를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