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점수 개인전: 無名 下

ARTIST
나점수
TITLE
無名 下
DATE
2025.03.18 (화) - 04.12 (토)
OPENING RECEPTION
2024.03.18 (화) 17:00
CREDIT
주최 및 주관: 아트스페이스3
글: 고충환
사진: 전병철

Art Space 3
Director Sookhee Lee
Curator Joohee Park
Assistant Curator Jihyeon Sim

Text by Kho Chunghwan
Photography by Byungcheol Jeon
나점수의 조각

틈새를 위한 조각, 태도가 조각이 될 때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비평)


선험적이라고 했다. 경험보다 먼저라고 했다. 의식보다 인식보다 이미 먼저 와있었다고 했다. 의미 이전의 문제라고도 했다. 아마도 사물이, 사태가, 존재가 미처 의미화되기 이전의 꼴 그러므로 형태라는 말일 것이다(정적인 작품). 아니면 작용 혹은 작동이라는 말일 것이다(움직이는 작품). 저절로 작용하는 상태, 수동적으로 작동되는 상태, 그러므로 이미 받아들여진 상태, 사로잡힌 상태라는 말일 것이다. 작가는 그렇게 작업의 성격을 유래를 함축한다. 그러므로 작가의 작업에는 어느 정도 직관적인, 무의식적인, 몸적인, 그리고 원형적인 부분이 있다. 작가의 작업은 뭔가, 왠지, 존재의 원형적인 꼴이라고 부를 만한 형태에, 그 존재 방식에 초점이 맞춰진 것 같다. 상대적이지만, 비평 주체도 창작 주체도 두 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 그중 한 눈은 현실원칙을 향하고, 다른 한 눈이 원형을 향한다. 한 눈이 현실참여에 투신한다면, 다른 한 눈은 존재가 유래한 곳을 더듬는다. 그중 작가의 눈 그러므로 성향(존 버거는 다르게 보기를 제안하는 기술이 예술이라고 했다. 보는 행위에서 이미 예술이 작동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은 원형을 향하고, 존재의 흔적을 찾아 헤매는 데서 작업의 존재 이유를 얻고 있는 것 같다. 여기에는 자기반성적인 경향과 함께, 자기를 넘어 존재를 논평하는 부분이 있다.
칼 융은 개인의 기억을 넘어선 아득한 기억을 집단무의식이라고 했고, 그 집단무의식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상징 그러므로 반복 상징을 원형이라고 했고, 원형적 이미지라고 불렀다(작가의 조각에서는 수평적이고 수직적인 구조, 그리고 사막적이고 틈새적인 조각과 형태). 서사 그러므로 이야기로 치면 이야기들의 이야기, 이야기가 유래한 원형적 이야기를 의미할 것이다. 형태 그러므로 이미지로 치면 이미지들의 이미지, 이미지가 유래한 원형적 이미지를 의미할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어쩌면 이미지(형태)들의 이미지(형태)를, 원형적인 이미지(형태)를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메를로퐁티는 의식 이전에 현상이 있었고, 현상이 의식의 지향호(선의식의 저수지)에서 유래한다고 본다. 그렇게 작가는 어쩌면 의식의 지향호의 밑바닥에 깔린 앙금(어쩌면 침묵)으로부터 의식 이전의 이미지를, 현상적인 이미지를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자연은 원래부터 그런, 스스로 그러한 존재의 꼴을 가지고 있다. 그렇게 작가는 어쩌면 원래부터 그런 존재의 꼴을, 스스로 그러한 자연의 형태를 찾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므로 작가의 작업은 외관상 자연을 소재로 한 것 같지만, 사실은 자연을 빌려 자연 속에 숨은 자기(원형적인 자기, 자기_타자, 혹은 불교에서의 진아)를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어느 정도 수행적인 면이 있다.

사막 같다. 작가의 작업을 보면 왠지 사막(세상의 끝? 금욕적인?)에 와 있는 것 같다. 최소한의 물기마저 찾아볼 수 없는 척박한 생존환경을 거처로 하는 것들, 이를테면 바람에 풀풀 날아다니는, 아니면 굴러다니는 마른 덤불 같고, 하얗게 표백된 뼛조각 같다. 바싹 마른 잎사귀 같고, 조약돌 같고, 먼지 같고, 부목 같고, 조가비 같고, 뗏목 같고, 노 같고, 수세미 같고, 씨방 같고, 씨앗 같다. 사막처럼 외진 이름 모를 해변에 떠내려온 것들, 그렇게 떠내려와 바람과 소금기에 충분히 풍화된, 습기 빠진 사각거림과 거친 질감을 간직한, 그렇게 어쩌면 자연이 만든 조각이고, 바람이 만든 조각이고, 시간이 만든 조각이라고 해도 좋을 형태들이다. 다만 그처럼 보일 뿐인, 바로 그것이라고 정색하고 지목하기는 어려운, 선입견이 아니라면 오리무중에 빠질, 그러면서도 어떤 알만한 형태를 고집스럽게 밀어 올리는, 암시적인 형태들이다. 추상이라고 하기엔 재현적이고, 재현이라고 하기엔 추상적이다. 재현과 추상의 사이를 넘나든다고 해야 할까. 재현과 추상의 경계를 허물면서 아우른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재현과 추상 사이의 스펙트럼을 오가는, 움직이는 게이지, 움직이는 잣대 같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게이지가 움직이면서 알만한 형태를, 아리송한 형태를, 오리무중의 형태를, 미증유의 형태를, 데자뷔를 불러일으키는 형태를, 친근하면서 낯선 형태를, 양가적인 형태를, 함축적인 형태를, 암시적인 형태를, 원형적인 형태를 밀어 올리고 있다고 해야 할까.
슬라보예 지젝은 억압된 욕망의 거처를 실재계(미셸 푸코의 헤테로토피아에 해당하는)로 명명하고, 황량한 바람만 부는 불모의 사막에다 비유한 적이 있다. 드물게 실재계가 열리면서 상징계 위로 출몰할 때가 있다. 심연이 열리는 순간이다. 이처럼 사막은 불모이지만, 작가는 불모의 사막에서 오히려 생명의 원천을 보고, 에너지의 근원을 본다. 존재의 원형을 보고, 존재의 흔적을 본다. 억압된 욕망(생명)이, 파토스가, 미처 의미화되지 못한 것들 그러므로 선의미가 침묵 속에서 발화하는 소리를 듣는다. 아무것도 없는 곳일수록 더 잘 보이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곳일수록 더 잘 들린다. 역설적이지만 역설이 아니다. 사막이 그렇다. 감각의 경제화, 감각의 미니멀이 실현되는 순간이라고 해야 할까. 사막의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으려면 에너지의 소비를 최소화해야 한다. 다시, 생명의 경제화, 생리의 미니멀이 실현되고 있다고 해도 좋다. 도널드 저드는 최소한의 구조를 미니멀과 결부시킨 적이 있지만, 그 결부는 어느 정도 사막에 대해서도, 사막을 소재 혹은 심리적 배경으로 한 작가의 조각에 대해서도 타당하다고 해도 좋다. 알다시피 미니멀리즘은 조각의 근거를 형태보다는 상황 논리에서 찾는다. 조각을 위해, 혹은 조각의 이름으로 일종의 연극적 상황이 연출되는 것인데, 즉물적 오브제와 공간 간 상호 간섭과 매개로 해서 가능해지는 일이다. 공간이 조각의 한 부분으로 편입되는 순간이다. 조각이 공간이 되고, 공간이 조각이 되는 순간이다.
작가는 사막에서 시를 봤고(혹은 들었고), 이후 자신의 작업은 공간이 곧 시라는 생각을 전제로 한다고 했다. 여기서 시란 아마도 작가가 지향하는 작업의 경지 혹은 차원이라고 해도 좋고(언어가, 의미가, 감각이 최소한의 상태를, 함축적인 상태를, 그러므로 경제적으로 최적화된 상태를 견지하고 있는, 어떤 상태 혹은 차라리 태도), 그 시가 전개되는 공간이 자신의 작업이라는 말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본격적인 공간연출작업(상황 조각 혹은 장소 특정적 작업)이라고 보기에는 좀 그렇지만, 적어도 오브제와 공간이 상호작용하는 작업, 오브제와 공간이 한 몸처럼 유기적인 전체로 움직이는 작업, 그렇게 공간이 하나의 시적 풍경이라고 부를 만한 어떤 지경을 열어놓는 작업으로 이해해도 무방할 것이다. 실제로도 작가의 작업에서 사막을 배경으로 한, 혹은 사막으로 유비되는 시적 풍경이 보이고 열린다는 점에서 사막과 시, 공간과 풍경을 결부하는 작가의 작업은 공감을 얻고 있다고 생각한다.

처음엔 파낸 것인가, 했다. 사실은 일부러 파낸 것이 아니라고 했다. 틈새라고 했다. 원래 있던 틈새를 살려 그 주변을 깎아내 조각한 것이라고 했다. 작가는 때로 혼자 움직이기도 버거울 통나무를 일일이 톱으로 썰어 틈새 주변의 나무의 살을 발라냈고, 그렇게 마치 바싹 마른 나뭇잎 같은, 하늘하늘한 종잇장 같은 얇은 조각을 만들었다. 나무 살을 다 발라내 얼핏 보면 잘 보이지도 않는 틈새를 남겼다고 생각하면 되겠다. 틈새를 지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살을 남기는 과정에서 작가의 조각에서 보는 것과 같은 우연한 형상이, 구조가 유래했다고 보면 되겠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온 나무의 살(톱밥)을 형태와 함께 전시했다. 나무에서 나온 살이 나무로 대변되는 존재의 근원과 유래를 떠올리게 하지만, 흔히 그렇듯 부분과 전체와의 상호유기적인 관계로 환원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존재의 실재를 재고하게 만드는, 재정의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부분은 부분일 뿐. 그 자체 또 다른 자족적인 존재의 꼴을 예시할 뿐.
그렇게 얇은 조각을 보고 있으면, 처음의 나무둥치를 상상하기 어렵다. 무모해 보이기도 하고 쉽게 이해하기도 어렵다는 점에서 작가의 작업은 노동집약적이고, 여기에 다시, 수행적인 면이 있다. 결과보다는 과정이 중요하고, 작가가 그 과정에 참여하고 있다는, 노동의 물증이, 감각의 흔적이 고스란한 것이 중요하다. 조각은 다름 아닌 그 노동의 증거여야 하고, 감각의 증언이어야 한다. 그래서 흔한 마감이라는 과정도 없다. 마감이랄 만한 것이 없다. 다만, 나무의 맨살, 노동의 맨살, 톱질의 맨살을 무모하게 주장하고, 간직하고, 증언할 뿐. 나무와 내가, 자연과 내가, 삶이 그런 것처럼 어떤 형태가 나올지 알 수 없는 미증유의 형태와 내가 씨름하고 교감한 생생한 흔적을 증거 할 뿐. 그 증언이 아니고 증거가 아니라면, 조각 자체는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작가에게 조각은 수행을 위한 도구였고, 자기를 찾기 위한 도구였다. 그리고 그 도구가 전통적인 조각과는 다른 조각을 열었다. 재현적인 조각이나 기념비적인 조각과 같은 전통적인 조각은 물론, 물성, 양감, 질감, 구조, 그리고 좀 더 현대로 오면 관계와 현상으로 정의되는 정통적인 모더니즘 조각과도 다른 지점을 짚고 있다. 그렇다고 프로세스아트에도 개념미술에도 환원되지 않는 어떤 지점을 열어놓고 있다. 조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조각에 대한 태도를, 태도가 곧 조각이 되는(태도를 증거 하는 조각? 태도가 물화 된 조각?) 어떤 경지를 제안하고 있다고 해도 좋다. 탈조각과 비조각을 매개로 조각을 확장하고 있다고 해도 좋다. 조각을 공간을 매개 삼아 시를, 풍경을, 시적 풍경을 열어놓고 있다고 해도 좋다.
작가는 통나무에서 틈새를 남기고 나머지 살을 다 발라냈다고 했다. 틈새를 위한 구조다. 틈새를 위한 형태다. 틈새를 위한 조각이다. 틈새가 사는 집이다. 차라리 잘 보이지도 않는 틈새가 숨어있는 집이다. 틈새가 사는 집이고 틈새가 숨어있는 집이라고는 했지만, 조각은 고사하고 누가 나무의 틈새에 주목한 적이나 있는가. 틈새가 없는 조각도 있지만, 작가의 조각은 어쩌면 이런 틈새 조각으로부터 유래했고 파생했다고 해도 좋다. 그러므로 틈새 조각의 변주라고 해도 좋다. 틈새가 뭔가. 나무가 갈라지고 터지면서 스스로 만든 흔적이다. 그러므로 상처의 흔적이다. 나무는 그렇게 상처를 속으로 속으로 숨긴다. 그 상처는 너무 깊어서 아무도 볼 수가 없다. 그 깊이를 헤아릴 수조차 없다. 다시 슬라보예 지젝을 소환하자면 실재계다. 심연이다. 모든 존재는 심연을 간직하고 있고, 모든 풍경은 심연을 내장하고 있다. 심연이 언제 열리는지, 그리고 언제 닫히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므로 심연이 열리지 않도록, 심연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할 일이다. 그렇게 작가는 존재의 틈새를, 상처를, 심연을 껴안고 있었고, 그 틈새를, 상처를, 심연을 위한 집을 지어주고 있었다. 여기서 다시, 작가는 어쩌면 조각보다는 조각에 대한 태도를 제안하고 있다고 했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에서 태도가 조각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