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eam, Drawing
제목도 어정쩡한 ‘견유모’라는 그림을 그렸을 때가 시작이었다. 옷을 벗고 샤워기 아래서 쏟아지는 물을 맞으며 눈을 감고 있었는데, 망막과 뇌를 연결하는 통로의 어딘가쯤에서 그런 것이 떠올랐다. 머리는 개(犬)인 여자가 미니스커트를 입고 어딘 가에 앉아서, 강보에 싸인 아기 같은 것을 안고 있었다. 그것을 그려서 남겨놓고 싶었다. 몸이 젖은 채로 샤워실에서 나와 식탁 위에 있던 아무 종이 쪼가리에 잡히는 대로 연필을 들고 그렸다. 그것은 금방 사라질 것 같았고, 붙잡으려고 할 때마다 희미해지는 것 같았으며, 그리는 동안 정말로 원래 있던 자리에서는 사라져버렸다. 잠깐이었다. 사라지고 나니 더 그릴 수 없었다. 그것은 마치 꿈을 사진 찍는 것처럼 느껴졌다. 셔터속도는 일분 정도? 조금 거창하게 말하면, 그것은 미지의 진실과 마주해서 긴장과 흥분이 내 몸을 관통하는 순간이었다. 그런 경험을 하고 나니, 이 그림(‘견유모’)은 잘 그리고 못 그리고를 떠나서 어떤 특별한 순간에 대한 증거의 의미가 담긴 것이 되었다. 상상 혹은 꿈이 나의 지각과 손을 매개로 해서 종이와 연필이라는 재료, 즉 물질의 세계와 이어진 순간 말이다. 그리고 꿈이라는 것, 혹은 의식의 흐름 속에서 떠올랐다 사라지는 이미지에 가까운 무언가를 드로잉을 통해 눈에 보이는 그림으로 만드는 것은 나의 작업에서 중요한 일부가 되었다.
(2020.7.20)
부정(否定)의 그리기
라깡의 ‘여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언술을 누군가가 인용한 것을 읽었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어떻게 언급할 수 있는가? 부정을 통해서 가능하다.
긍정과 존재와 명명됨이라는 저주.
그렇다면 부정과 비존재와 무명은 구원이 될 수 있을까?
붓을 내려놓고, 부정에 대해 생각한다.
음수(陰數)와 부정화법(否定話法)처럼, 부정의 그리기.
(2020.7.23)
허점들
붓질이 픽셀과 닮아 있던 시기가 있었다. 그렇게 된 것은 어느 정도 우연이었는데, 나는 그 닮음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다시 한동안은 그런 그리기의 방식을 떠나 있었다가, 최근에 그런 규칙적인 붓질이 다시 살아났다. 이전과 달라진 점이라면 그리드를 사용해서 붓질의 크기와 간격을 더 균일하게, 일종의 도트처럼 만들었다는 것. 즉 규칙성이 보다 강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생각해보면 나는 그림을 그릴 때, 특히 회화에 접근할 때 ‘무엇을’보다는 ‘어떻게’에 대해 더 고민하는 쪽이다. 이전의 픽셀과 닮은 붓질이나 최근의 그리드에 의한 도트를 고안한 것 모두 나의 그러한 접근법을 반영하고 있다. 작업의 흐름 속에서 분기점 같은 것이 생겨 이전과 이후가 구분되는 것은 그때까지의 작업 경험들 및 스스로 미처 다 의식하지 못하는 여러가지의 영향들에 의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나의 도트 페인팅이 그러한데, 당연하게도 그것은 결론이나 목적지라기보다는 새로운 출발지, 시작점이 되어 나는 그로부터 작업의 새로운 국면을 이끌어 내고 있다.
조금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보면, 나는 처음부터 화면을 도트로 빈틈없이 채운 것이 아니라 거의 정확히 반만 채웠다. 그러니까 붓질들은 화면 전체에 고르게 퍼져 있지만, 그 사이사이에 그려진 도트와 거의 같은 면적의 그려지지 않은 부분이 번갈아 가며 교차되어 남겨져 있었던 것이다. 체스판과 비슷했다. 나는 그 상태가 다 채워진 상태보다 흥미로웠고, 그 빈칸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먼저 그려진 도트와 구분되도록 무채색을 사용해 보기도 했다가, 그렇게 채워지는 것이 아무래도 만족스럽지 않아서 먼저 그려진 도트들의 크기와 색채 등을 조절해 보기도 했다. 붓질을 두껍게 여러 번 쌓아 올려 보기도 했다. 그렇게 여러가지 시도들을 해보았지만 이 ‘그려지지 않은 부분’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 과정을 통해 그려진 도트들이 조금씩 커지고 두꺼워지고 서로 경계가 맞닿아 이어지면서 점으로서의 성격이 약해졌다면, 오히려 그려지지 않은 부분은 조금씩 작아지고 깊어지면서 또 다른 도트로서의 존재감을 더 강하게 드러낸 것이다. 그것은 말 그대로 ‘허점들’이었다.
여기서 약간은 신기한 의식의 전환이 새겼다. 그것을 ‘허점’이라고, 부정의 부정으로 존재하는 점(도트)이라고 인식한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채워야만 할 것 같은 공백이 아니라, 반대로 작업을 명확하게 규정해주는 핵심적인 장치가 되어버린 것이다. 스스로도 알지 못했지만 ‘픽셀을 닮은 붓질’의 작업들 이후 내가 찾아 헤매던 것이 바로 이것이 아니었을까. 말하자면 그것은 그려짐만큼 그려지지 않음을 포함하는 구조이고, 필연적으로 완성될 수 없는 그리기이다.
(2021.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