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지, 성시경, 정현두, 한성우
ARTIST
전시기획
강석호, 이은주
TITLE
당신의 삶은 추상적이다
DATE
2019. 9. 6 (Wed)- 10. 11 (Fri)
OPENING RECEPTION
2019. 9. 6 (Wed) / pm 6
ARTIST TALK
일시 : 2019년 9월 21일(토) 오후 4시
장소 : 아트스페이스 3
참여작가 : 박형지, 성시경, 정현두, 한성우
장소 : 아트스페이스 3
참여작가 : 박형지, 성시경, 정현두, 한성우
아트스페이스3에서는 《당신의 삶은 추상적이다》전을 9월 6일(금)부터 10월 11일(금)까지 개최한다. 이 전시는 아트스페이스3이 외부 기획자를 초청하는 기획 프로젝트로서 열린다. 지난 6월 열린 추상미술 전시 《이것을 보는 사람도 그것을 생각한다》의 연장선에서, 최근 젊은 작가들을 중심으로 부각되고 있는 추상미술 작업들을 조명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이 전시의 작가들은 구체적 대상에서 출발하지 않고 머리에 떠도는 관념에 가까운 이미지나 공감각적 경험, 그리는 과정에서 발현되는 감각, 심상이나 감정 등 삶 자체와 같이 본래 추상적 상태에 있는 것들을 시각화한다. 그려지는 과정에서 그림에 개입되는 예기치 않은 사건들을 중시하며, 그리는 신체행위인 붓질이나 그림 안에서 어느 순간 작동되는 조형적 논리는 그림을 결정하는 중요한 변수가 된다.
박형지는 인터넷에 떠도는 기사나 잡담 같은 이야기를 계기로 삼아서 그것에서 떠오른 심상을 회화로 번안하거나, 그리는 과정에서 특정한 심상을 연상시키는 이미지를 찾아내기도 한다. 망치고 다시 그리는 반복적인 과정에 의해서 비물질적인 상태에 있던 것들은 특정한 시각적 형식을 갖게 된다. 물감 자국들이 엉망이 된 부엌을 연상시키는 <키친 헬>이나 지구평면설을 믿는 사람에 대한 기사를 읽고 그린 <지구평면론자>(2019)처럼, 그는 부단하게 그려가는 매일의 행위를 통해 일상과 예술가적 망상 사이에 있는 어떤 지점을 조형적인 균형점으로 전환시켜 포착한다. 그것은 그의 회화적 이미지가 현실과의 관계에서 위치하는 지점이도 하다.
성시경은 하나의 캔버스 평면 안에 여러 개의 프레임이 등장하는 추상회화 작업을 지속해왔다. 그는 하나의 조형논리로 단일한 프레임 안에서 완결하는 그리기 방식을 의도적으로 피하고, 여러 프레임들 사이의 불일치나 간극이 만들어내는 의외성을 수용한다. 이로써 통제되지 않은 새로운 동인이 그림 속에 끊임없이 들어올 수 있는 상태가 유지된다. 캔버스 틀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이러한 그리기의 방식에 의해서, 그림은 지속적인 긴장과 활기를 얻게 된다. 그 결과 하나의 캔버스 안에 서로 다른 계기점이나 속도, 에너지가 다중적으로 공존하게 된다.
정현두의 경우 머릿속 관념처럼 윤곽선이 없는 덩어리와도 같은 이미지를 붓질로 체현시키는 과정이 곧 그림이 된다. 이미지는 붓질이라는 행위에 의해 작가의 신체와 동기화되면서 일정한 방향성을 가진 추상적인 회화 속 형상이 된다. 이러한 형상들은 모호한 상태로 있는 이미지를 작가의 살아있는 신체적 감각에 의해 회화라는 평면 위에 붙잡아 놓은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의 회화적 이미지는 어떤 풍경을 떠올리게 하는데, 작가 스스로 “주어 없는 문장”이라고 언급하듯 의미가 종결되지 않은 채 작가가 그려낸 다른 작품들과 상호연결되면서 열린 해석이 가능한 상태로 남겨진다.
한성우의 작업에서는 화가의 붓질이라는 신체적 행위의 흔적이 그림의 이미지를 결정한다. 그는 내러티브가 없이도 오로지 색채와 물성, 필치만으로 화면 위에 고조되었다가 끝나는 일련의 드라마를 펼쳐놓는다. 화면 위에서 유지하고 있는 그리는 자의 생생한 감각의 결과인 그의 물질적인 회화 안에는 치열하고 동적인 동시에 빛이 스며나오는 듯한 정적인 순간이 함축되어 있다. 이는 화폭 위에서의 움직임과 그로부터 거리를 두는 관조적 시선이 함께 개입되기 때문일 것이다. 이와 같은 특성으로 인해 그의 작업은 언제나 생동적이면서도 사건이 모두 끝난 고요한 풍경이나 잔해를 연상시킨다.
이 전시의 작가들은 구체적 대상에서 출발하지 않고 머리에 떠도는 관념에 가까운 이미지나 공감각적 경험, 그리는 과정에서 발현되는 감각, 심상이나 감정 등 삶 자체와 같이 본래 추상적 상태에 있는 것들을 시각화한다. 그려지는 과정에서 그림에 개입되는 예기치 않은 사건들을 중시하며, 그리는 신체행위인 붓질이나 그림 안에서 어느 순간 작동되는 조형적 논리는 그림을 결정하는 중요한 변수가 된다.
박형지는 인터넷에 떠도는 기사나 잡담 같은 이야기를 계기로 삼아서 그것에서 떠오른 심상을 회화로 번안하거나, 그리는 과정에서 특정한 심상을 연상시키는 이미지를 찾아내기도 한다. 망치고 다시 그리는 반복적인 과정에 의해서 비물질적인 상태에 있던 것들은 특정한 시각적 형식을 갖게 된다. 물감 자국들이 엉망이 된 부엌을 연상시키는 <키친 헬>이나 지구평면설을 믿는 사람에 대한 기사를 읽고 그린 <지구평면론자>(2019)처럼, 그는 부단하게 그려가는 매일의 행위를 통해 일상과 예술가적 망상 사이에 있는 어떤 지점을 조형적인 균형점으로 전환시켜 포착한다. 그것은 그의 회화적 이미지가 현실과의 관계에서 위치하는 지점이도 하다.
성시경은 하나의 캔버스 평면 안에 여러 개의 프레임이 등장하는 추상회화 작업을 지속해왔다. 그는 하나의 조형논리로 단일한 프레임 안에서 완결하는 그리기 방식을 의도적으로 피하고, 여러 프레임들 사이의 불일치나 간극이 만들어내는 의외성을 수용한다. 이로써 통제되지 않은 새로운 동인이 그림 속에 끊임없이 들어올 수 있는 상태가 유지된다. 캔버스 틀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이러한 그리기의 방식에 의해서, 그림은 지속적인 긴장과 활기를 얻게 된다. 그 결과 하나의 캔버스 안에 서로 다른 계기점이나 속도, 에너지가 다중적으로 공존하게 된다.
정현두의 경우 머릿속 관념처럼 윤곽선이 없는 덩어리와도 같은 이미지를 붓질로 체현시키는 과정이 곧 그림이 된다. 이미지는 붓질이라는 행위에 의해 작가의 신체와 동기화되면서 일정한 방향성을 가진 추상적인 회화 속 형상이 된다. 이러한 형상들은 모호한 상태로 있는 이미지를 작가의 살아있는 신체적 감각에 의해 회화라는 평면 위에 붙잡아 놓은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의 회화적 이미지는 어떤 풍경을 떠올리게 하는데, 작가 스스로 “주어 없는 문장”이라고 언급하듯 의미가 종결되지 않은 채 작가가 그려낸 다른 작품들과 상호연결되면서 열린 해석이 가능한 상태로 남겨진다.
한성우의 작업에서는 화가의 붓질이라는 신체적 행위의 흔적이 그림의 이미지를 결정한다. 그는 내러티브가 없이도 오로지 색채와 물성, 필치만으로 화면 위에 고조되었다가 끝나는 일련의 드라마를 펼쳐놓는다. 화면 위에서 유지하고 있는 그리는 자의 생생한 감각의 결과인 그의 물질적인 회화 안에는 치열하고 동적인 동시에 빛이 스며나오는 듯한 정적인 순간이 함축되어 있다. 이는 화폭 위에서의 움직임과 그로부터 거리를 두는 관조적 시선이 함께 개입되기 때문일 것이다. 이와 같은 특성으로 인해 그의 작업은 언제나 생동적이면서도 사건이 모두 끝난 고요한 풍경이나 잔해를 연상시킨다.
당신이 현실을 묻는다면 모른다고 말할 것이다.
난 단 한 번도 당신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어. 그만큼 나에게 있어서 당신은 절대적인 존재였지. 예전에도 잠깐 언급한 적 있었지만 당신이 시내버스에서 파는 손목시계를 나에게 건네주며 “이것은 원자력으로 가는 시계야!” 라고 했을 때도, 난 당신의 말이었기에 의심하지 않았어. 어쩌면 나는 사람의 말을 있는 그대로 잘 듣는 편일지 몰라. 하지만 이젠 그럴 수도 그러지도 못해. 모든 사물을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내 모습이 현실에선 전혀 낯설지 않거든. 간혹 나만의 모습이라기 보단 사회적 현상의 단편일지도 모른다 생각해. 이런 현상이 꽤 오래도록 지속되는 기분은 나만의 것일까! 아니면 지금의 내가 “생각의 소음”을 편안하게 받아들여야만 현대인의 일상 속에 표류하는 존재로 인식하게 되기 때문일까. 생각해보면 “너”라는 “생각의 소음”은 단순히 현대인의 삶과 같이 공존한 사회적인 현상은 아닐 거야. 봄의 미세먼지가 모든 미디어를 흔들어 대도 우리는 항상 알고 있었어. 이것도 금방 지나갈 거란 것을. 하지만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너는 “결”이 다르게 우리 내부의 한편에 항상 있었지. 그것은 마치 현대인의 질병 같아. 전염병처럼 우리의 삶을 잠식시키지. 때론 현실 그대로의 모습이 아닌 변형된 혹은 다른 존재가 되기도 해. 그렇게 넌 우리 곁의 삶에 기생하며 평소의 모습을 유지할 거야. 사실 넌 전염병도 질병도 아니야. 네가 나의 현실에 같이 공존하게 된 지금, 불안전하지만 가끔은 흥미롭게도 해. 그래서일까. 현실의 나는 사유의 숲에 갇혀 길을 잃을 때가 많아. 그래도 난 항상 너와 같이 숨을 쉴 때, 비록 익숙한 풍경이 아니어도 괜찮다 생각했어. 어디든 상관없이 가까이 다가갈수록 수많은 겹을 가진 또 다른 네가 나를 마중 나올지라도, 그렇게 나와의 간격을 좁히며 긴장감을 높이고, 나의 모습이 어느 위치에 있는지 가늠조차 할 수 없더라도, 그렇게 먹먹히 서서, 의심과 부정의 시선으로 너를 마주하면 할수록, 진실을 의심하게 되고, 자기주장을 강하게 역설하는 원인이 되겠지. 얼마 전에 만난 화가의 이야기를 듣고 현실에 갇힌 자아 덩어리를 상상했어. 근데, 자아라는 단어의 표현은 왠지 항상 어둡게 느껴져. 그래도 작업실의 분위기와 작업에서 드러나는 기운은 외로운 사고를 가진 자아가 세련된 형식의 붓질을 미묘하게 하더군. 마치 현재에 보여지는 외적 형상이 아닌, 내적 현실감의 무게를 무심히 대처하려는 재치에 가까워 보였어. 어쨌든 그렇게 표현된 화가의 몸짓과 시선은 나에겐 별 의미 없게 다가왔어. 단지 화가의 즐거운 상상을 몰래 훔쳐보는 기분이랄까. 난 화가의 이야기를 듣는 중에 문득 웃긴 생각이 났어. 그가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는 그 무엇이 있다는 거야. 나는 언제쯤 나를 자랑스럽다 생각했을까. 아마도 2002년 축구경기를 보는 동안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했었던 것 같아. 그 당시엔 독일에 머물고 있을 때여서 더 그랬었는지 몰라. 그리고 시간이 흘러 자랑스러움에 대한 나의 태도를 견제하기에 이르렀지. 세련된 문화의 삶과 스스로를 자랑스럽다 여기는 태도를 같은 선상위에 놓는 소행마저 촌스러운 것이라 느꼈거든. 그 이유가 뭔지 알 수 없지만 말이야. 그렇게 십 여 년을 보내던 어느 해, 수많은 이들에게 “좌절”이라는 단어가 전혀 낯설지 않았던 그 해, 그 덕분이라고 말해야 하나. 2002년에 광장문화를 직접 경험하지 못한 아쉬움을 “좌절”과 함께 경험하게 되었어. 자발적인 공동체의 형성과 대치되는 힘의 균형이 나의 존재를 각인시켜 주었어. 비록 이 두 경험의 근원적인 측면이 같을 수 없지만, 각양각색의 존재감들이 보여준 광장의 한 장면을 뭐라 표현할 수 있을까. 지금도 나는 불안한 현실과 다양한 사유의 불신에서 기인한 사회구조에 살고 있어. 하지만 난 “인간의 조건”을 다시금 생각하고 싶어. “오직 우리가 행하는 것을 사유하겠다.” 라는 누군가의 말이 요즘 자주 떠오르는 이유가 이와 무관하진 않겠지. 간혹 정치인들의 말을 듣다보면 동물농장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될 때도 간혹 있지만. 어쨌든 다시 한 번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는 예술가들의 욕망에 지금 주목해야한다고 생각해. 상대적으로 많은 예술가들이 현실의 이면에 더 관심을 갖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인 것 같아. 그 이면이, 현실의 전반적인 면을 대변할 수 없지만, 이면의 현실에 상대적으로 많은 문화인들이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미디어를 통한 정보에 지쳤고, 신뢰를 잃어버린 사회구조의 현실을 다시 보려는 거겠지. 난 이런 예술가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생각해. 근래엔 그마저도 소용없어진 것 같지만. 예술과 현실정치 참 어렵지. 그냥 내 머릿속을 헤집어 놓은 기분. 사실 난 현실의 이면 보다 표면에 관심이 더 많거든. 난 표면과 이면이 어떻게 공생하고 구성되고 있는지 잘 몰라. 현실의 난, 이전의 내 모습도 미래의 나도 아니더라구. 지금 여기에 서 있는 나로부터의 그림자, 거기까지의 거리와 면적이 내 현실이겠지. 하지만 난 부정할거야.
강석호 (작가)
난 단 한 번도 당신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어. 그만큼 나에게 있어서 당신은 절대적인 존재였지. 예전에도 잠깐 언급한 적 있었지만 당신이 시내버스에서 파는 손목시계를 나에게 건네주며 “이것은 원자력으로 가는 시계야!” 라고 했을 때도, 난 당신의 말이었기에 의심하지 않았어. 어쩌면 나는 사람의 말을 있는 그대로 잘 듣는 편일지 몰라. 하지만 이젠 그럴 수도 그러지도 못해. 모든 사물을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내 모습이 현실에선 전혀 낯설지 않거든. 간혹 나만의 모습이라기 보단 사회적 현상의 단편일지도 모른다 생각해. 이런 현상이 꽤 오래도록 지속되는 기분은 나만의 것일까! 아니면 지금의 내가 “생각의 소음”을 편안하게 받아들여야만 현대인의 일상 속에 표류하는 존재로 인식하게 되기 때문일까. 생각해보면 “너”라는 “생각의 소음”은 단순히 현대인의 삶과 같이 공존한 사회적인 현상은 아닐 거야. 봄의 미세먼지가 모든 미디어를 흔들어 대도 우리는 항상 알고 있었어. 이것도 금방 지나갈 거란 것을. 하지만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너는 “결”이 다르게 우리 내부의 한편에 항상 있었지. 그것은 마치 현대인의 질병 같아. 전염병처럼 우리의 삶을 잠식시키지. 때론 현실 그대로의 모습이 아닌 변형된 혹은 다른 존재가 되기도 해. 그렇게 넌 우리 곁의 삶에 기생하며 평소의 모습을 유지할 거야. 사실 넌 전염병도 질병도 아니야. 네가 나의 현실에 같이 공존하게 된 지금, 불안전하지만 가끔은 흥미롭게도 해. 그래서일까. 현실의 나는 사유의 숲에 갇혀 길을 잃을 때가 많아. 그래도 난 항상 너와 같이 숨을 쉴 때, 비록 익숙한 풍경이 아니어도 괜찮다 생각했어. 어디든 상관없이 가까이 다가갈수록 수많은 겹을 가진 또 다른 네가 나를 마중 나올지라도, 그렇게 나와의 간격을 좁히며 긴장감을 높이고, 나의 모습이 어느 위치에 있는지 가늠조차 할 수 없더라도, 그렇게 먹먹히 서서, 의심과 부정의 시선으로 너를 마주하면 할수록, 진실을 의심하게 되고, 자기주장을 강하게 역설하는 원인이 되겠지. 얼마 전에 만난 화가의 이야기를 듣고 현실에 갇힌 자아 덩어리를 상상했어. 근데, 자아라는 단어의 표현은 왠지 항상 어둡게 느껴져. 그래도 작업실의 분위기와 작업에서 드러나는 기운은 외로운 사고를 가진 자아가 세련된 형식의 붓질을 미묘하게 하더군. 마치 현재에 보여지는 외적 형상이 아닌, 내적 현실감의 무게를 무심히 대처하려는 재치에 가까워 보였어. 어쨌든 그렇게 표현된 화가의 몸짓과 시선은 나에겐 별 의미 없게 다가왔어. 단지 화가의 즐거운 상상을 몰래 훔쳐보는 기분이랄까. 난 화가의 이야기를 듣는 중에 문득 웃긴 생각이 났어. 그가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는 그 무엇이 있다는 거야. 나는 언제쯤 나를 자랑스럽다 생각했을까. 아마도 2002년 축구경기를 보는 동안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했었던 것 같아. 그 당시엔 독일에 머물고 있을 때여서 더 그랬었는지 몰라. 그리고 시간이 흘러 자랑스러움에 대한 나의 태도를 견제하기에 이르렀지. 세련된 문화의 삶과 스스로를 자랑스럽다 여기는 태도를 같은 선상위에 놓는 소행마저 촌스러운 것이라 느꼈거든. 그 이유가 뭔지 알 수 없지만 말이야. 그렇게 십 여 년을 보내던 어느 해, 수많은 이들에게 “좌절”이라는 단어가 전혀 낯설지 않았던 그 해, 그 덕분이라고 말해야 하나. 2002년에 광장문화를 직접 경험하지 못한 아쉬움을 “좌절”과 함께 경험하게 되었어. 자발적인 공동체의 형성과 대치되는 힘의 균형이 나의 존재를 각인시켜 주었어. 비록 이 두 경험의 근원적인 측면이 같을 수 없지만, 각양각색의 존재감들이 보여준 광장의 한 장면을 뭐라 표현할 수 있을까. 지금도 나는 불안한 현실과 다양한 사유의 불신에서 기인한 사회구조에 살고 있어. 하지만 난 “인간의 조건”을 다시금 생각하고 싶어. “오직 우리가 행하는 것을 사유하겠다.” 라는 누군가의 말이 요즘 자주 떠오르는 이유가 이와 무관하진 않겠지. 간혹 정치인들의 말을 듣다보면 동물농장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될 때도 간혹 있지만. 어쨌든 다시 한 번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는 예술가들의 욕망에 지금 주목해야한다고 생각해. 상대적으로 많은 예술가들이 현실의 이면에 더 관심을 갖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인 것 같아. 그 이면이, 현실의 전반적인 면을 대변할 수 없지만, 이면의 현실에 상대적으로 많은 문화인들이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미디어를 통한 정보에 지쳤고, 신뢰를 잃어버린 사회구조의 현실을 다시 보려는 거겠지. 난 이런 예술가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생각해. 근래엔 그마저도 소용없어진 것 같지만. 예술과 현실정치 참 어렵지. 그냥 내 머릿속을 헤집어 놓은 기분. 사실 난 현실의 이면 보다 표면에 관심이 더 많거든. 난 표면과 이면이 어떻게 공생하고 구성되고 있는지 잘 몰라. 현실의 난, 이전의 내 모습도 미래의 나도 아니더라구. 지금 여기에 서 있는 나로부터의 그림자, 거기까지의 거리와 면적이 내 현실이겠지. 하지만 난 부정할거야.
강석호 (작가)
불확정적인 것들이 붓질이 되는 순간
그림이 가시적인 대상을 지시하지 않을 때 관람자인 나는 무엇을 보는가? 이러한 그림들 앞에서 ‘좋다’라고 느꼈을 때 나 역시 대부분 내가 본 것에 대한 감흥의 원천을 한 마디로 설명하기 어렵다. 명확한 정보를 전하지 않는 이러한 그림들 앞에서, 관람자로서의 내가 느끼는 시각적 쾌감이나 감각적인 충만함, 혹은 보다 심원한 곳을 건드리는 정신적 자극의 갈래들을 분석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무의미한지도 모르겠다.
초기 추상미술의 많은 작가들은 대상을 떠나는 그림들을 그리면서, 자신의 작품들을 ‘새로운 리얼리즘’으로 천명했다. 비재현적인 추상미술이 현실을 떠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적인’ 작업을 지향하고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실상 이처럼 대상을 떠난 추상적인 그림들은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운동감이나 소리를 연상시키는 리듬감처럼 대상에 대한 공감각적 경험을 수용하며 유클리드 기하학의 좌표 안에 대상의 물리적 윤곽을 포획하는 방식으로는 표현될 수 없는 리얼리티를 추구한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유행했던 추상미술 역시 신체적 감각이 체현된 붓질을 통해 대상 그 자체보다 더 본질적인 삶의 상태를 실시간으로 포착하고자 했다. 결국 작가가 자신에게 보다 더 ‘현실적인’ 것이라고 믿는 것에 대한 인식의 문제가 그림의 형식을 결정하는 것이다.
이 전시 작가들의 그림들에도 대부분 뚜렷한 윤곽선이 없다. 윤곽선이 없다는 것은 물리적인 시각장 안에서 고정된 좌표를 갖지 않는 상태를 그리고 있음을 의미한다. 여름날 몸에 닿는 열기에 찬 습도가 어떤 데이터 보다 직접적으로 날씨에 대한 진실을 전하는 것처럼, 정형화될 수 없는 상황이나 흐름 자체를 들여옴으로써 그림은 실체에 더 가까운 상태를 지시하게 된다. 그 불확정적인 비정형 상태를 어떤 회화적 형식으로 붙잡아 둘 것인가에 따라 추상회화의 어법 역시 다양하게 분화된다. 이 작가들의 작업에서 드러나는 것은 덩어리 같은 머릿속 이미지가 붓질을 통해 신체와 동기화되면서 드러나는 형상의 방향성(정현두), 캔버스라는 클리쉐를 받아들이는 동시에 그 통제에서 끊임없이 벗어남으로써 지속되는 예민한 긴장감과 활력(성시경), 언어화된 영역 바깥에 존재하는 생동하는 감각들이 화면에 물질로서 남겨놓은 치열한 흔적(한성우), 일상 현실과 예술가적 공상 사이의 어떤 지점을 붓질을 통해 포지셔닝해가는 조형적 감각(박형지)이다.
이러한 작업들은 물리적 차원에 속하지 않기에 본래 추상적이자 불확정적인 이미지의 세계로부터 출발하여, 물감이라는 질료와 붓질이라는 신체행위를 통해 회화평면 위의 이미지로 귀결된다. 이와 같은 차원의 전이 과정에서 그리는 자의 조형감각은 질료와의 투쟁 혹은 유희의 과정과 필연적으로 연결되며, 이에 따라 예기치 않은 사건들이 지속적으로 화면에 개입된다. 그 붓질은 생각하는 동시에 신체적이며, 세계를 인식하는 동시에 물리적 현상 속에 있는 화가의 감각을 전한다. 플라토닉한 조형적 유토피아와 실존적인 행위의 사이의 중간지대에서, 이 작가들은 그들이 살고 있는 현재의 삶에 대한 감각을 체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은주 (독립기획자, 미술사가)
그림이 가시적인 대상을 지시하지 않을 때 관람자인 나는 무엇을 보는가? 이러한 그림들 앞에서 ‘좋다’라고 느꼈을 때 나 역시 대부분 내가 본 것에 대한 감흥의 원천을 한 마디로 설명하기 어렵다. 명확한 정보를 전하지 않는 이러한 그림들 앞에서, 관람자로서의 내가 느끼는 시각적 쾌감이나 감각적인 충만함, 혹은 보다 심원한 곳을 건드리는 정신적 자극의 갈래들을 분석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무의미한지도 모르겠다.
초기 추상미술의 많은 작가들은 대상을 떠나는 그림들을 그리면서, 자신의 작품들을 ‘새로운 리얼리즘’으로 천명했다. 비재현적인 추상미술이 현실을 떠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적인’ 작업을 지향하고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실상 이처럼 대상을 떠난 추상적인 그림들은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운동감이나 소리를 연상시키는 리듬감처럼 대상에 대한 공감각적 경험을 수용하며 유클리드 기하학의 좌표 안에 대상의 물리적 윤곽을 포획하는 방식으로는 표현될 수 없는 리얼리티를 추구한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유행했던 추상미술 역시 신체적 감각이 체현된 붓질을 통해 대상 그 자체보다 더 본질적인 삶의 상태를 실시간으로 포착하고자 했다. 결국 작가가 자신에게 보다 더 ‘현실적인’ 것이라고 믿는 것에 대한 인식의 문제가 그림의 형식을 결정하는 것이다.
이 전시 작가들의 그림들에도 대부분 뚜렷한 윤곽선이 없다. 윤곽선이 없다는 것은 물리적인 시각장 안에서 고정된 좌표를 갖지 않는 상태를 그리고 있음을 의미한다. 여름날 몸에 닿는 열기에 찬 습도가 어떤 데이터 보다 직접적으로 날씨에 대한 진실을 전하는 것처럼, 정형화될 수 없는 상황이나 흐름 자체를 들여옴으로써 그림은 실체에 더 가까운 상태를 지시하게 된다. 그 불확정적인 비정형 상태를 어떤 회화적 형식으로 붙잡아 둘 것인가에 따라 추상회화의 어법 역시 다양하게 분화된다. 이 작가들의 작업에서 드러나는 것은 덩어리 같은 머릿속 이미지가 붓질을 통해 신체와 동기화되면서 드러나는 형상의 방향성(정현두), 캔버스라는 클리쉐를 받아들이는 동시에 그 통제에서 끊임없이 벗어남으로써 지속되는 예민한 긴장감과 활력(성시경), 언어화된 영역 바깥에 존재하는 생동하는 감각들이 화면에 물질로서 남겨놓은 치열한 흔적(한성우), 일상 현실과 예술가적 공상 사이의 어떤 지점을 붓질을 통해 포지셔닝해가는 조형적 감각(박형지)이다.
이러한 작업들은 물리적 차원에 속하지 않기에 본래 추상적이자 불확정적인 이미지의 세계로부터 출발하여, 물감이라는 질료와 붓질이라는 신체행위를 통해 회화평면 위의 이미지로 귀결된다. 이와 같은 차원의 전이 과정에서 그리는 자의 조형감각은 질료와의 투쟁 혹은 유희의 과정과 필연적으로 연결되며, 이에 따라 예기치 않은 사건들이 지속적으로 화면에 개입된다. 그 붓질은 생각하는 동시에 신체적이며, 세계를 인식하는 동시에 물리적 현상 속에 있는 화가의 감각을 전한다. 플라토닉한 조형적 유토피아와 실존적인 행위의 사이의 중간지대에서, 이 작가들은 그들이 살고 있는 현재의 삶에 대한 감각을 체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은주 (독립기획자, 미술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