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동승의 회화: 이미지의 세계, 이야기-점-틈의 순환
김진주 Kim Jinju | 미술 연구·기획
임동승은 이야기와 점, 틈으로 회화를 구성한다. 화가가 그리는 그림은 본래 그림을 그리기 이전에 접근한 이미지에서 유래한다. 세상의 수많은 이미지에 다가가기가 점점 더 용이해지는 오늘날, 화가의 눈에는 본 것을 뛰어넘는 이미지가 맺힌다. 무언가를 본 화가는 자신의 경험을 떠올리고 그에 이어지는 또 다른 경험 혹은 이미지를 덧붙여 상상한다. 임동승은 이를 연장해 한 단계 더 나아간다. 상상 이후의 시간에서, 그에게는 보기의 시간이 다시금 불려진다. 자신이 본 것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일로서의 그리기. 그는 머릿속에 입력된 이미지들에 이야기를 부여하고, 회화 화면에 점과 틈을 그림으로써 그가 보고 있는 세계로 되돌아간다.
우리는 세상이 내어놓은 이미지에 열려 있다. 디지털 기기의 발전은 이미지를 우리 곁에 산재하게 만들었다. 특히 알고리즘 기술로 구현된 디지털 세계는 특정 이미지와 닮은 이미지를 무한히 제공하며 우리가 이미지에 접근하는 방식을 변화시켰다. 산재하는 이미지는 개별적인 정보를 가진 데이터로서 이를 본 누군가의 눈에 흘러 들어간다. 이제 우리의 삶은 고정된 이미지를 선택해 제시하는 능동적 자세가 아니라 쏟아지는 이미지에 노출되어 선택을 강요받는 수동적 자세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현실에서 동시대 화가는, 손에 닿는 것을 회화의 대상으로 불러오던 과거와 다르게, 구시대가 범접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양의 이미지가 자신에게 들어오기를 기다린다.
임동승의 그림은 그가 수동적인 태도로 이미지를 받아들이는 일에서 출발한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그는 이미지를 선택할 때 ‘수신기’와 같은 모습이 된다. 그는 주관적인 의도와 배경지식이 쌓인 화가이기를 미루어 두고, 신호가 입력되기를 기다린 뒤 잡힌 신호를 내보내는 역할로 자신을 바라본다. 그의 머릿속에는 외부에서 입력받은, 달리 말해 데이터로서 들어온 이미지들의 모음이 떠다닌다. 그가 이미지라 부르는 것은 실제로 보고 기억하고 상상한 모든 상을 말한다. 어느 찰나의 순간에 마주한 얼굴, 과거에 감상한 영화, 어린 시절에 즐겨 본 만화, 일상에서 발견한 풍경을 비롯해 책을 읽거나 누군가의 말을 듣고, 혹은 스스로 상상해 떠올린 장면들까지. 그에게 이미지는 반복적으로 보여지고, 그럼으로써 일종의 코드화되어 집적되고 저장된 속성을 지닌다. 즉 선택자로서 지니던 주관성과 무관하게 그는 이미지가 산재하는 현실을 이해하고자, 그것의 있음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렇게 시작한 그의 그림은 그를 붙든 것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방편으로 그려진다. 그에게 그림이란 낱개의 데이터로 정보화된 이미지들의 생태가 화가인 자신에게 미치는 영향을 관찰하는 장이다. 이 장에는 그가 받아들인 이미지에 이야기를 부여하는 과정, 이야기 위에 점과 틈을 덧대는 일이 펼쳐진다. 그에게 들어온 이미지는 그가 그린 화면에서 이야기로 엮인다. 이야기로 연결된 이미지는 그가 화면에 얹은 점의 형상으로 구현되거나 점으로 덧대어진다. 언뜻 두 가지 축으로 나뉘는 듯한 그의 그리기 방식은 사실 그가 이야기와 점을 빌려 구체화된 무언가의 ‘있음’을 작동시키고 그 반대편에 자리한 ‘비어 있음’의 가닥에 닿기 위해 고안한 원리다. 이야기는 서사가 분명하지만 그도 알 수 없는 규칙으로 지어지고, 점은 형상을 동반하지만 그려질수록 틈을 발생시킨다. 이는 곧 그가 그리는 이미지의 세계가 맥락 없이 흩어진 채 구현되었음을, 그 속에서 그는 수동적 상태로 이미지의 입력을 목도하는 존재가 됨을 말함으로써 주관성이 소거된 이미지의 세계와 선택권이 사라진 화가의 세계 양쪽에 비워진 무언가 있음을 빗댄다.
임동승의 머릿속에서 융화된 이미지들은 그에 의해 이야기로 형성되고, 그 이야기는 회화를 경유해 재구성된다. 그는 보거나 기억한, 혹은 상상한 이미지들을 하나의 구조로 잇는다. 여기서 구조란 이야기를 구성하는 요소 중 하나로, 서사의 흐름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가 흐름을 가진 서사를 만드는 일을 영화(혹은 애니메이션)나 드라마, 연극 등에서 시나리오를 꾸미는 일에 대입할 수 있겠다. 그는 그가 떠올린 무수한 이미지들 가운데 몇 가지를 연결하려 하는데, 단순히 연관이 없는 이미지를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등장 인물, 등장 요소처럼 서로 적절한 관계를 맺도록 설정하여 전체적인 이야기를 만든다. 그 과정에는 기승전결과 클리셰라는 서사의 규칙이 작동하며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체계적인 흐름을 가진 서사로서 이야기의 역할이 부여된다. 그러나 그는 글과 시놉시스로 이를 창작하는 무대(혹은 컴퓨터) 뒤의 작가와 달리, 화가의 위치에서 무의식적이고 비합리적이며, 때로는 과장되고 무효한(효과적이지 않은) 접근을 시도한다. 화가인 임동승은 합리적이고 명확한 방식으로 점철되는 것이 아닌, 기존의 규칙적인 구조를 빗나가고 여러 방식으로 읽힐 수 있는 유연한 이야기를 작동시키는 것이다.
이야기가 두드러지는 그림으로 〈자본주의의 발걸음〉(2022)과 〈전생담 제9번〉(2024)을 살펴보자. 〈자본주의의 발걸음〉에는 왼쪽으로 걷는 두 남자가 등장한다. 이 그림은 유난히 밝고 경쾌한 색채를 띠며, 그려진 형상도 한정적이지만 꽤 분명하게 판별할 수 있다. 배경의 건물을 보건대 이곳은 유럽 어딘가에 남아 있는 중세 시대의 어느 마을인 듯하다. 보라색 옷을 입은 남자는 만화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악당(빌런)의 모습을 압축하며, 흰색 옷에 흰색 중절모를 쓴 남자는 겉모습으로 보아 단정한 성격의 신사 같다. 건물과 두 인물 사이에 놓인 사슴 모양의 형상은 구석기 시대에 벽화로 그려진 동물이나 샤먼처럼 보인다. 즉 이 그림은 중세 건물, 악당, 신사, 벽화라는 각각의 구체적인 정보를 가진 이미지들을 모아 특정한 장면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연출된 장면은 ‘자본주의의 발걸음’이라는 제목을 통해 자본주의가 팽배한 유럽 문명에 관한 비판적 논조를 얻으며 이야기를 완성한다.
〈전생담 제9번〉은 부처님의 전생담이다. 화면 중앙에는 분홍색의 기이한 물체가 보인다. 왜인지 일본의 초현실적인 공상과학 만화에서 본 듯한 새로운 기계, 혹은 네덜란드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스(Hieronymu Bosch)의 〈쾌락의 정원(Tuin der lusten)〉(1503-1515)에서 본 기괴한 생명체와 흡사하다. 전면의 오른쪽에는 여러 매체에서 손 그림이나 그래픽으로 구현되어 온 영웅(히어로)을 닮은 인물이 자리한다. 손을 뻗어 화면 밖으로 나가는 듯한 그의 동세는 과장된 단축법을 활용해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는 전형적인 애니메이션의 방법론을 따른다. 그 뒤로 이런 모습의 영웅이 출연할 것 같지 않은 평화로운 자연 풍경이 나타나며, 주변에는 캐릭터화된 곰, 날개가 연장된 새, 활활 타는 불까지 등장한다. 개별 요소를 놓고 보면 자연스럽기가 어려운 구성이지만, 어느 순간에는 말이 될 만한, 친절한 말로 ‘초현실적’으로 꾸며진 어떤 영화의 한 장면을 멈춘 듯하다. ‘전생담’이라는 제목처럼 이 그림은 원숭이 왕이 비참한 처지의 동물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이야기를 담는다. 정확히 말하면 그림이 그런 이야기라기보다 그런 이야기를 닮아 있다. 한 가지 흥미로운 건 그가 이 그림을 그리기 전, 드로잉을 할 때 종이를 연장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종이 한 장을 두고 머릿속에서 이미지들을 상상하고 엮어 장면을 그렸다. 그러다가, 예를 들어 새를 그린 뒤 곰을 그리겠다는 생각으로 부족해진 지면에 다른 종이를 덧대어 이었다. 이때 그가 이야기로 붙인 부처님의 전생담은 드로잉을 그린 뒤 종이를 잇는 사이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그가 알고 있던 모종의 이야기였다. 완결된 시나리오가 아니라, 열린 시나리오를 상상하는 과정이 그의 드로잉에 그대로 녹아 있는 것이다.
한편, 그가 이미지를 입력받으며 이야기를 만들고 그림을 시작했다면 출력을 하는 방식에는 점(도트, dot)을 활용한다. 그는 드로잉을 그린 뒤 화면에 그리드를 대입해 분할된 면을 분석한 결과로 캔버스에 점을 그리거나, 일반적인 방식으로 캔버스에 그림을 그린 다음 그 위에 점을 찍는다. 그에게 점은 저장된 모든 이미지를 균질하게 다룰 수 있는 그리기의 방법론이다. 이미지가 디지털 화면에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픽셀이 필수적이기에, 그는 이러한 데이터로서 이미지의 속성을 이해하고자 점을 택했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그에게 점은 모든 대상에 일정하게 다가가도록, 다시 말해 주관적인 독해를 이용해 분류하지 않고 동등한 객체로서 이미지를 받아들이게끔 자신을 이끌어 주는 매개체다. 점과 점이 모여 면이 될 때는 반드시 틈이 남는다. 즉 점과 점 사이에는 언제나 빈 곳, ‘허점’이 생긴다. 여기서 그의 그림은 부정의 인식을 불러일으키는 비어 있음(허점)과 긍정의 인식으로 대변되는 있음(점)이 공존하는 화면을 통해 미완의 상태, 완성의 상태를 동시에 운반한다. 이야기에 이어 다시 한번 이미지가 세계에 펼쳐진 방식에는 맥락이 없음을 짚어 내며, 그런 이미지에 다가가는 화가에게는 선택의 자유가 무용함을 되새긴다.
2010년대, 그는 가로로 그은 짧은 붓질을 화면에 채우는 기법을 시도하며 이전의 회화와 다른 변화를 꾀했다. 이후 2020년을 기점으로 짧은 붓질은 유지하되 그 모양이 점에 가까워지는 식으로 차이를 둔다. 멀지 않은 과거에 그는 그리드로 분할한 작은 면을 축 삼아 그 안을 기계적으로 메우며 이미지를 납작하게 만드는 일에 몰두했다. 반면 현재는 그리드의 선을 따라가며 찍은 점과 찍지 않은 허점의 공존이 만드는 변증법적 물음 그 자체에 의의를 둔다. 최근의 이러한 시도는 고르게 그은 획이 동일한 넓이로 구획된 면을 차지하던 예전과 달리, 그리드에서 선이 만나는 곳에만 점을 찍거나 점을 찍을 명확한 위치를 정해 두지 않는 등 의도적으로 화면에 빈 곳을 남긴다. 천편일률적인 그리드의 면에 붓을 그어대던 과거의 방법이 가산의 방식이라면, 지금은 이를 반전하듯 더하기보다 빼기라는 감산의 방식에 접근한다. 쉽게 말해 그는 점이라는 형태에 대해 전보다 유연한 태도를 취하는 것인데, 이러한 변화는 그가 화면의 짧은 획을 ‘가로로 그은 붓질’이 아닌 ‘점’으로 명명한 일과 동반되었다. 이때 그가 점을 찍는 양상은 화면에 손상을 가하는 행위와 유사하다. 그는 그리는 이미지와 거의 무관한 색의 점을 찍어 버리거나 거친 붓질로 화면을 치듯이 점을 그린다. 이는 이미 그려진 (혹은 이미 그림이 되기로 결정된) 화면 이후의 시점에서 완성된 이미지의 한편을 ‘지우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점으로만 채워진 그림은 점이 아닌 곳을 비운다. 그런데 화면 일부에만 들어간 점은 그 자리가 바로 비워진 곳이 된다. 이제 그의 화면은 점, 그리드, 허점이 상호적인 관계를 맺는 동시에, 그 관계에서 파생한 허점이 두드러진다. 이렇게 허점의 존재, 허점의 갈래가 불어난 그림은 그가 완성의 체계로부터 멀어져 미완의 상태에 다가가도록 이끈다.
인물, 풍경, 정물 등 대상의 종류와 관계없이 그가 그린 대부분의 그림 위에 점이 나타난다. 이 점들은 얼핏 ‘찍혔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나, 그가 각 대상에 접근하는 방식에 따라 다른 맥락을 띤다. 그중 인물의 얼굴을 그린 회색 조의 그림들은 순식간에 그려진 것으로, 어떤 경계에 관해 환기한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 격렬했던 그의 움직임, 그에 상응해 불규칙하게 얹어진 마띠에르가 점의 형상으로 드러난다. 마치 ‘지나가는’ 식으로 그려진 인물들은 그것이 애초에 그가 그릴 인물을 선택할 때부터 이미 실제 존재와는 거리가 멀었던 기억 속 이미지에서 비롯한 것임을 상기시킨다. 이들은 그가 본 것도 보지 않은 것도 아닌, 상상한 것도 상상하지 않은 것도 아닌 그사이의 경계에 속한다. 풍경화의 범주로 점철되는 〈우리가 만약 모든 것을 잃는다면〉(2024)은 그가 이례적으로 사진을 보고 그린 그림으로, 화면은 촘촘하고 명확하게 정렬한 점으로 채워졌다. 하늘, 땅, 인물, 무엇 하나 빠짐없이 점으로 이루어진 형상은 사진에 담긴 형태를 거의 재현에 가깝게 묘사한다. 그런데 풍경은, 그의 말에 따르면 사진 이후의 다른 준비가 필요한 대상이 아니다. 풍경이란 기억된 상과 다르게 빛의 유희와 같은 공간에서의 재미를 모색하게 만듦으로써 명도와 채도, 색 같은 기본적인 그리기의 요소에 대한 탐색을 동반시킨다. 그러므로 그의 풍경화에서 점은 머릿속의 어렴풋한 형상이 아니라 눈앞에 놓인 납작한 사진에 나타난 공간의 특성을 유영하기 위한 장치다.
정물을 그린 〈천수관음〉(2023)은 흥미롭게도 그릴 때의 즉흥성이나 공간에 관한 이해를 넘어 광범위한 접근에서 회화에 대한 그의 철학을 담아낸다. 화면에는 실제 천수관음 상에 비해 단순해진 형태에 점으로 채워진 이미지가 자리한다. 이는 그가 과거에 본 천수관음을 기억해 거칠게 드로잉을 그린 뒤, 다시 그 드로잉을 시작점 삼고 기계적으로 정확하고 엄밀한 규칙을 따라 점을 찍어 그린 그림이다. 화면에서 천수관음은 중앙이 아닌 왼쪽에 치우쳐져 있는데, 대칭에서 멀어진 형상은 드로잉에서 휘몰아친 그의 손길을 회화에 그대로 그려낸 사실을 증명한다. 이에 더해 그는 기억 속 천수관음의 이미지와 천수관음을 드로잉으로 변환한 이미지 모두를 따라잡고자 한 겹의 점 그림 위에 여러 겹의 점을 덧대었다. 이로써 현실의 천수관음이라는 대상은 기억, 드로잉, 점의 형상, 여러 겹의 점이 만든 복수의 시차를 통과하며 회화라는 새로운 이미지로 재탄생한다.
그렇게 임동승의 그림에서 이미지는 하나의 세계가, 세계는 이야기가, 이야기는 그림이, 그림은 회화가 되어간다. 그는 이야기와 점을 통해 그의 머릿속에 입력된 이미지 간의 연결을 매개함으로써 틈에 관한 사유를 길어 올린다. 이야기와 점, 그리고 틈. 사실 그의 회화를 관통하는 그리기의 방식을 단순하게 정리해 보자면, 그가 그리는 것은 그림을 그리는 동안 충분히 달라질 여지를 확보한 열린 과정이다. 그가 상상하는 이야기는 그 속에 등장하는 대상 간의 긴밀한 관계를 담보하지 않는다. 또한 그가 그리는 점은 점과 점 사이의 채워지지 않는 부분을 생성함으로써 비어 있음을 솟아 낸다. 그가 처음 이미지를 받아들일 때의 시간으로 돌아가 본다. 그에게 입력되는 이미지들은 근원적으로 규칙이 없고, 어디에나 산재하며, 부지불식간에 찾아온다. 화가로서 임동승의 역할은 그 무맥락의 세계를 바라보고, 마음대로 이어보는 일에 있을 뿐. 이미 비워진 곳을 비워 놓는 것이 그가 택한 보기의 방식이다. 비어 있음을 보는 그의 유연한 태도는 이야기와 점, 틈을 경유해 회화로 이룩한 화면 다음의 세계에서 다시금 떠오른다. 데이터인 이미지에 다가가고 그것이 사는 방식을 이해해 볼 수 있다면. 임동승의 회화는 이를 해내기 위한 방편으로서 작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