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파편들이 살이 될 때

ARTIST
김도희
문지영
좌혜선
TITLE
내 안의 파편들이 살이 될 때
DATE
2025.6.20 (금) - 07.19 (토)
OPENING RECEPTION
2025.06.20 (금) 17:00
CREDIT
기획 박주희(아트스페이스3 큐레이터)
기획 보조 심지현 (아트스페이스3 어시스턴트 큐레이터) 
그래픽 디자인 장윤아
사진 전병철
비평 이민주
주최/주관 아트스페이스3
전시 서문

글: 박주희

《내 안의 파편들이 살이 될 때》는 ‘고정되지 않고 개별 단위에서 발생하는 연약함을 어떻게 시각적으로 강렬하게 드러낼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서 시작된다. 연약함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는 것은 단지 개인의 취약성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상황과 내면의 경험이 만나는 틈에서 그 의미를 재구성하고, ‘다시-쓰기’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때 연약함을 향한 주장은 각자의 경험과 위치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며 우리가 보지 못하거나 인식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여러 파편의 이야기일 수 있다. 참여 작가인 김도희, 문지영, 좌혜선은 ‘자기 서사’ 에 기반하여 자신만의 체계화된 언어를 구사하거나, 타자를 맞이하고, 다시 자신에게 돌아가는 모습을 보인다.1) 이들의 작업은 자기 자신을 거쳐 진실을 말하려는 움직임으로 읽힌다. 이들이 기록한 진실은 때때로 ‘오토픽션(autofiction)’ 의 특징이 엿보인다.2) 참여 작가는 개인적 경험과 감정을 사회적 맥락 속에서 확장하여 이를 통해 자아와 타자, 내면과 외부 세계의 경계를 넘나드는 새로운 서사를 만들어낸다. 이처럼 개인적이고 내밀한 이야기는 너무 사적이라 이론이 될 수 없다는 인식에 의문을 제기하고 자기 서사를 이론 개입의 차원에서 사유하려는 시도들과 맞닿아 있다. 개개인의 감정 또한 통제되고 관리되어야 하는 시대에서 말하기 어려웠던 자신의 몸과 마음을 온전하게 나타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누군가에게 들키기를 꺼리거나 감추고 싶었던 이야기가 아니라 재현의 자기모순 즉, 재현하는 행위가 수반하는 해석의 개입, 의미의 왜곡, 권력관계의 재생산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라 생각했다. 과거처럼 정서적 유대 속에서 함께 성장하거나 서로를 지탱하던 관계의 구조는 경쟁 체제와 개인화된 사회 구조의 심화로 인해 점차 해체되었고 개인은 타자와 연대 없이 자신에게 부여된 연약함과 고통을 홀로 감당해야 하는 조건에 놓이게 되었다. 자기 서사는 이러한 고립의 조건 속에서 자신을 살피는 하나의 태도가 될 수 있다. 우울과 불안, 증오가 사적인 것으로 격리된 시대는 개인의 내면에 복잡한 분열과 갈등을 만들어내는데 이러한 분열의 조건 속에서 자기 서사는 내면적 균열의 솔직한 고백이자,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한 실천이 된다. 작가는 종종 내면화된 정체성과 외부 환경의 충돌 속에서 다중으로 출몰하는 자기 이미지 사이를 살아내야 하는 존재가 된다. 이 지점에서 자기 서사는 복합성과 균열을 인식하고 해석하는 수행적 실천이자 자신의 위치를 발화하는 행위로 기능한다. 또한 자기 서사는 타인을 ‘대변하지 않고 곁에서 말하기’ 위한 제스처로 작동한다. 이때 ‘나’가 견지한 연약함과 분열은 제거되어야 할 잔여가 아니라 다시 관계 맺기를 위한 가능성의 형태로 재건되며 전시 안에 출현한다. 전시 제목인 《내 안의 파편들이 살이 될 때》는 자기 서사의 개별 파편에서 출발해 이들의 작업에서 이러한 파편들이 몸과 살을 통과해 실재로써 형상화된다. 여기서 파편은 분절된 기억, 분열된 정체성, 해체된 감정의 조각들이며 이는 살 이라는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실천을 통해 다시 엮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뜻한다. 3)



1) ‘자기 서사’라는 용어는 이 글에서 로렌 푸르니에(Lauren Fournier)의 『자기이론: 자기의 삶으로 작업하기』(마티북스, 2025)에서 제시된 ‘자기 이론’(self-theory) 개념에 기대어 사용한다. 푸르니에는 자기 이론을 삶의 이야기와 이론적 사유가 맞닿는 지점에서 출발하는 비평적 글쓰기이자, 자기 자신을 이론화하는 여성주의적 실천으로 정의하며 자기 서사를 단순한 자전적 고백이 아니라 이론으로의 개입과 정치적 수행의 방식으로 확장시킨다. 다시 말해, 자기 서사는 자기 경험은 이론적·사회적 맥락과 연결지어 사유하고 해체하는 하나의 실천이다.
2) 사실을 바탕으로 하되, 전통적인 자서전의 진실성 요구를 거부하고 허구적 전개를 통해 자아를 재구성하는 서사 방식
3)  모리스 메를로 퐁티(Maurice Merleau-Ponty)의 정의에 따르면, '살'은 감각하는 자와 감각되는 자가 분리되지 않고 맞닿는 지점이며, 주체와 객체의 구분이 흐려지는 존재의 층위를 의미한다. ‘살’은 감각을 일으키는 주체이면서 동시에 타자의 시선이나 접촉 속에 감각되는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이중적 성질은 존재를 일방적인 주체 또는 대상이 아닌 관계적 존재로 이해하게 한다.
김도희
김도희는 자신의 몸과 살이 의미를 생성하는 주체이자 실천의 장으로 작동시킨다. 닭을 죽여 손질하거나 거대한 종이에 어린 아이의 배뇨를 적셔 지린내를 드러내는 과거의 작업을 통해 생명, 연약함, 비천한 존재, 물성과 감각의 경계를 지속적으로 드러내었다. 김도희 작업에선 극한의 감각적 자극과 그로 인한 저릿함(혹은 아릿함)을 느낄 수 있다. 이 저릿함(혹은 아릿함)은 자극에 머물지 않고 보는 이의 몸도 동시에 일깨우며 김도희의 몸과 살에 접속하게 만든다. 이처럼 김도희는 자신의 몸과 살을 작업에 적극적으로 개입시키는데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빛선소리>는 약 20m의 규모가 되는 벽에 온몸을 실어 마찰, 진동, 소리의 흔적을 표면에 새겨 살아 있는 몸과 살을 전면화한다. 표면은 더 이상 수동적인 외피가 아닌 소리와 감각의 진동을 일으키는 장이 된다. 손가락 틈에 목탄을 끼워 벽의 표면을 쓸고 마찰시켜 발생하는 사운드와 몸과 살의 흔적을 포함하여 시각적, 비시각적 매체가 동시에 활용되고 비정형한 형상으로 <빛선소리>는 존재한다. 또한 <빛선소리>는 전시 시작 전에 모두에게 제작 과정이 공개된다. 항상 부분적일 수밖에 없다는 자기 서사의 한계를 넘어서 자신을 노출하는 방식으로 자기 서사를 구현한다. ‘배꼽 위의 파도’는 내면적 고백에 그치지 않고 보여지는 대상인 동시에 보는 주체가 되는 혼합된 상태로 전개되며 퍼포먼스 과정을 그대로 노출시킨다. 의도와 지향에 따라 몸의 기관을 움직이며 살갗을 맞대며 만들어낸 거대한 <빛선 소리>는 보이는 동시에 볼 수 있는 흔적으로 남으며 얽히게 된다. 이러한 작업은 시간과 노동이 집약되어 신체적 고통을 수반하는데 이때의 고통은 감각을 깨우는 진동인 동시에 몸의 한계를 확장하고 타자와의 접점을 여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이처럼, 김도희는 퍼포먼스와 여러 사건을 자주 전시장에 공유하며 타자와의 접속을 여는 출발점으로 삼는다. 타자로의 이동을 가시화하는 작업으로 <배꼽산>이 있다. 몸 안쪽으로 파여 있던 배꼽을 캐스팅하는 과정을 거쳐 오목했던 형태의 배꼽이 볼록한 양감으로 바뀌는 전환의 순간을 만든다. 배꼽의 안쪽은 뒤집혀 언덕처럼 솟은 조형물로 재구성된다. 배꼽은 생의 출발점이자 단절의 흔적이며 내부와 외부를 가르는 경계이기도 하다. 김도희는 이 구조를 재배열함으로써 ‘나’와 ‘당신’ 사이의 또 다른 접촉면을 마련한다. 이번 전시에서 배꼽은 종(鐘)의 형태 작품 <배꼽번개>로 구현되었고 관객(당신)이 <배꼽번개>를 치면 울림이 발생하는 구조다. 이때의 진동과 울림은 몸과 몸, 자신과 타자, 작품과 공간 사이의 관계가 공명하며 퍼진다. 몸과 살을 통해 드러나는 자신은 롤랑 바르트 (Roland Barthes)의 말 -“타인들의 삶이 곧 나의 삶에 기입되고 상감되어 있다.”-과 같이 고립된 발화가 아닌 타자와의 접속을 가능하게 한다. 김도희에게 소리, 마찰, 진동은 몸과 공간과 타자 사이의 관계를 형성하는 핵심적 요소로 자신의 고유한 몸과 살을 통해 연결되는 이미지로 전시장에 남겨 진다. 전시장은 몸과 살의 부속물과 연장물이 중첩되고 결합한 상태의 모습으로 가득하다. 김도희가 생성한 복잡하고 들끓는 결들은 전시장을 뒤덮어 여기 저기 엉켜 있다. 
문지영
문지영의 작업에 등장하는 인물인 어머니와 동생은 정면을 응시하거나, 얼굴이 지워져 있거나, 배경에 스며 있다. 명확한 결론도 단정된 의미도 없다. 분명하거나 따뜻한 공동체로만 가족은 그려지지 않으며 때로는 감정의 흐름이 유예되거나 절제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여성에게 돌봄은 종종 운명처럼 주어지는 역할로 받아들여지며, 이에 따라 자기 자신을 뒤로 미루거나 소외시키는 경험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문지영의 작업은 그러한 구도로부터 거리를 두고 돌봄이 내밀하게 요청되었던 순간들 혹은 감정의 분배가 작동하던 구체적인 장면들을 조심스럽게 되짚는다. 어머니와 동생을 그리면서도 그것이 단편적인 가족 서사나 사랑의 기록으로 귀결되지 않는 이유는 그 감정의 결이 복잡하고 양가적이기 때문이다. 문지영의 작업은 가족을 중심으로 한 자신의 이야기를 다루지만 그 감정은 단순한 사랑의 서사로 귀결되지 않는다. 작가는 밀착과 저항의 이중 구조를 느끼며 사실과 허구를 혼합하는 방식으로 내면적 갈등과 타자와의 관계를 재구성한다. 예를 들어, 이번 신작 <철푸덕>에서는 동생과 노는 장면 속 자신의 얼굴을 붉은 물감으로 범벅된 채 표현한다. 이 붉은 물감은 허구와 사실이 교차하는 내면의 서사를 과감히 드러내는 장치로 작동한다. 또는 자신의 감정에 더욱 집중하는 모습으로 해석할 수 있다. 에서는 병원복에 일반적으로 나염되는 ‘HOSPITAL’이라는 단어 대신 자신의 감정을 반영한 ‘LOVE and HATE’라는 텍스트를 직접 그려 넣어 감정의 상태를 드러낸다. 문지영이 그려내는 서사는 단순한 자기 고백이 아니라 불완전한 서사와 감정의 모호함을 시각적으로 풀어내는 작업으로 하나의 일관된 이야기로 환원되기 어려운 자기 서사의 특징을 보여준다. 이 감정의 이중성을 은폐하지 않고 그 긴장 안에서 자신이 어떻게 구성됐는지를 지속적으로 그리고 끈질기게 분석하는 것이다. 문지영의 작업은 가족, 특히 어머니와 동생이라는 가장 가까운 타자를 바라보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초기에는 인물뿐 아니라 배경까지 세심히 묘사하며 되도록 구체적으로 현실을 재현하려는 노력이 엿보였다. 그러나 최근작을 보면 화면은 점차 구체적인 서사보다는 감각의 표현적 밀도와 정서적 여운이 강조되고 인물은 남아 있지만 화면 전반에 과감한 붓질이 더해진다. 문지영과 나눈 대화에서 그는 “그림을 그려야 했는데, 그 앞에 있었던 게 가족이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는 미리 준비된 서사나 담론이 아니라 삶의 긴급성에서 출발한 기록이었다. 작가는 그릴 수밖에 없었고 어머니와 동생을 그렸다. 시간이 지난 지금 문지영은 자신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기 시작했다. 작가는 작업에서 자신을 집중하지만 자신이 중심이 아니라 관계와 감정의 여백 안에서 유동하는 존재로 자리 잡는다. 돌봄과 감정, 가족, 그리고 자기 자신은 복합적인 흐름 속에 놓이며 그 흐름은 종종 정리되지 않은 채 남는다. 따라서 문지영은 자신만의 고백도 누군가의 이야기를 대변하거나 말하는 작업이 아니라 내면을 따라 흐르는 자기 서사의 층위로 볼 수 있다. 작가는 그 층위의 사이에서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자기 자신과 타자 혹은 나와 당신을 연결하는 또 다른 관계 맺기의 언어로 회화를 지속한다.
좌혜선
좌혜선의 작업에서 작가 자신은 고정된 개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내부와 외부가 뒤섞이며 변형 가능한 존재로 제시된다. 초기 작업인 <냉장고, 여자 #2>에서 자기 내면의 감정과 일상적 문제를 중심으로 서사를 구성하며 당장 먹고사는 문제를 회화적으로 표현했지만 점차 타인의 고통으로 시선을 확장해 나갔다. 자기 서사는 타자와의 접촉과 마주침 속에서 구성되며 작가는 내면과 외부를 그 속에서 자신을 실천적으로 구성한다. 산업재해로 사망한 동료를 두고 다시 현장으로 돌아가는 끼니의 숙명과 진창을 표현한 는 가혹함을 이겨내기 위한 몸부림을 담고 있다. 이후 작가는 몸의 뒤틀림, 분비물을 연상시키는 액체, 그리고 바깥과 안쪽의 파열을 야기하는 구멍과 같이 주체의 잔여를 드러내며 자기와 분리될 수 없는 존재들을 시각화한다. 좌혜선의 작업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일그러진 몸, 피부의 균열과 드러난 살은 자기 보존의 경계를 위협하며 배제되었으나 여전히 자아에 잔존하는 것에 대한 혐오와 끌림을 교차시킨다. 작품에 등장하는 구멍은 단순한 공백이 아니라 자아와 타자의 경계를 허물고 상호작용을 하는 지점으로써 역할을 한다. <흐르고 넘치는 것 #2 >와 같이 몸은 점점 해체되며 표면과 균열만 남게 되는데 이는 타자와 스며들고 해체되는 과정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근작으로 갈수록 몸은 살의 형태로 옮겨가며 회화의 표면은 끈적임을 시각화한다. 이때 표면은 단순한 배경이 아닌 감정이나 대상이 쉽게 떨어져 나가지 않고 그 안에 붙잡히는 끈적임과 끈적임을 느끼는 곳이 된다. 이러한 특징으로 작품은 몸과 감정, 자기와 타자가 지속적으로 연결되고 뒤엉키는 접촉의 장을 만들고 작가는 이를 통해 세계에 참여하고 의미를 능동적으로 구성해 낸다. 끈적임은 주변의 것을, 서로 다른 것을 들러붙게 하기에 질서를 파괴하는 위협으로 여겨질 수 있지만 동시에 타자를 수용할 가능성을 품고 있다. 예를 들어 <샘 #1>은 구멍과 가슴을 연상시키며 구멍에 빠질 것 같은 혹은 들러붙을 것 같은 위협을 감각적으로 보여 준다. 동시에 매혹과 불안이 교차하는 양가적인 지점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좌혜선은 살을 드러내고, 타자의 흔적을 기록하며, 자기와 타자가 영향을 미치는 순간들을 보여준다. 이러한 교차하는 장면들은 작가가 지속적으로 고민해 온 자기 안에서 타자를 어떻게 끌어들일 수 있는가 라는 질문과도 연결된다. 더 나아가 <몸, 공간#1>에서는 공간의 개념이 반영하며 화면은 더욱 구체화하고 정적인 구도와 원근의 깊이를 갖추게 된다. 이 변화는 이전보다 더 안정된 시점을 제공하지만 동시에 액체적 질감, 구멍, 끈적임과 같은 요소들을 남겨 타자를 요청하는 조건을 조성한다. 이 조건은 응시의 흐름을 분산시키며 관계 맺기를 위한 틈과 여백으로 이끈다. 좌혜선은 자신의 삶을 출발점으로 삼으며, 원초적인 몸과 살의 원형을 통해 타자의 고통을 감각하고, 긴장감을 형성하며, 공간을 출현시키기도 한다. 결국 좌혜선에게 자기 서사는 단일한 자아의 진술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형되고 연결되며 만들어지는 관계적 과정으로 작동하며 계속 변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