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의 모국어, ‘함께 공동으로 슬퍼하기’ 안에 머무는 것
심상용(서울대학교 미술관장)
조각의 모국어 : 살핌
조각의 모국어는 무엇인가? 나무를 어떻게 깎아야 목조각이 모국어로 말하는 것이 되는가? 어떻게 해야 이미 멸종했거나 멸종할 언어로 조각하기를 면하고, 모국어를 잃어버린 조각가 신세를 면하는 것인가?
우선은 나무를 사용하거나 다루는 우월한 주체를 자각하고, 마음에서 올라오는 깊은 연대감으로 그것을 신화화하거나 대상화하지 않는 지각으로 지각하는 것으로부터다. 그러한 고유하게 조각적인 지각을 나점수 작가는 ‘살핌’이라는 개념으로 함축한다. 조각의 모국어는 살핌으로서의 지각 안에서 발휘되고, 그것을 통해서 “붙들 수 없는 근원”에까지 나아가는 것이 허용된다. 빛에 의해 드러나는 공간과 물성만을 고집하는 조각은 근원이 마른 샘과도 같다. 그것은 현상에 대한 오독만 있을 뿐 근원으로 향하는 길은 부재하는, 모국어를 상실한 조각이다. 그런 조각은 헛것이며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그가 침묵하는 것은, 명상의 시늉을 하지만 실은 언어가 없기 때문이다. 그 때 나무를 깎는 행위는 나무를 소모하는 별스럽고 현대적인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조각은 그 자체로 죽은 것이거나 최소한 비옥함과는 거리가 먼 나무 깎기일 뿐이다.
나점수는 조각적 지각인 살핌으로서의 지각, 곧 붙잡을 수 없는 근원을 붙잡으려는 애씀으로 나무 앞에 선다. 그렇게 마주할 때 비로소 나무를 보는 ‘응시의 감각’이 생성된다. 이 응시의 감각으로부터 나누고 고립시키고 지배하는(divide, isolate and dominate) 인식의 대안으로서 통합하고 대면하고 공생하는(Integrate, meet, coexist), 진정으로 조각적 인식을 위한 토대가 마련되고, 조각의 시침을 돌아가게 만드는 힘이 조금씩 축적되고, 뿔뿔이 흩어져 사방으로 비산되었던 조각적 사유의 파편들이 다시 한 자리로 모인다.
하지만 이런 개념적인 설명만으로는 나점수의 조각이 나무와 통합되고, 대면하고, 공생하는 관계를 충분히 드러낼 수 없다.(개념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자기 친구 개념들을 더 많이 데려와 길게 늘어놓는 것 외에 달리 무엇이 있겠는가) 더 나은 이해를 위해서는 감성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독일의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에 의하면, 깊은 연대에 기반하는 관계의 저변에는 “서로 함께 공동으로 슬퍼하는 것”이 내포되어 있다. 관계해야만 하는 모든 것의 배경에 무명(無名)의 죽음이 있기 때문이다. 죽음 이후의 시간에는 누구도 이름을 붙일 수 없기에 무명의 죽음이다. 나점수 작가는 말한다. 어떤 궁극의 순간을 향해 매 순간 변하는 세계 자체의 슬픔이요, 그것에 조응하는 “붙잡을 수 없는 것을 붙잡으려는 행위”로서 인식의 슬픔이기도 하다고, 기록하거나 개념화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슬픔이라고, 나무를 깎을 때 그 무상한 노동의 단위들에서 불가피하게 대면하게 되는 슬픔이라고 말이다.
현대판 신상(神像) 조각가들이여 안녕!
고대 바빌로니아 왕국의 조각가들은 나무를 깎아 신상을 만들었다. 바빌로니아의 주신이었던 ‘태양의 아들'이라는 뜻을 지닌 마르두크(Marduk)의 신상이었다. 부와 풍요의 상징이었던 마르두크 신상(神像) 제작은 바빌로니아의 큰 산업이었다. 바빌로니아의 조각가들은 사람들에게 더 인상적인 신상을 만들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남 유다의 예언자 이사야(Isaiah)에게 그들이 만든 신상은 공허한 헛것에 지나지 않았다. 숭배의 대상은 그들의 욕망이었을 뿐이다. 바빌로니아인들의 욕망, 내킬 때면 아무 때나 복을 비는 손쉽고 편리한 신, 그들은 그들의 필요에 따라 그 신상에 기도한다. “나를 구원해 주소서. 당신은 나의 신입니다.” 좀 바보 같지 않은가 … 이들은 … 실재감이 너무도 뒤떨어지는 사람들이어서,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마르두크 신상과 같은 우상 제작이 고대문명에만 횡행했고, 고대의 조각가들만 그 일에 임했던 것은 아니다. 우상 제작은 돈과 과학과 첨단 기술문명을 주신으로 섬기고 있는 오늘날에 오히려 더 만연하고, 현대조각가들도 고대의 선조 못지않게 열을 올리는 중이다. 현대조각도 고대인들의 신상 조각보다 조금도 더 고상하지 않은 탱천(撐天)하는 욕망의 대리충족이 목적인 20세기, 21세기 버전의 우상들을 제작하느라 여념이 없다.
슬픔의 하나의 근거가 이것이다. 현대인이야말로 욕망에 매몰된 삶을 사는 인류기에, 그것의 대리 충족 기제에 온통 매달릴 수밖에 없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내부에선 땅의 일에 정신이 팔린 채 사는 ‘존재론적 매몰’이 매순간 일어나고 있기에, 그 매몰을 보상하기 위해 우상을 소환하는 수밖에 없다. 시몬느 베이유(Simone Weil)는 말한다. “그것-우상-이 없으면 우리는 날마다, 혹은 매일을 진공상태로 괴로워해야 한다.” 참된 자유가 아닌 자유를 느끼게 하고, 참된 정신의 해방이 아닌 해방을 감각적 탐닉으로 대리충족 하도록 이끄는 것들은 그 외형이 아무리 현대적인 조각으로 간주되더라도, 본질적으로 바빌로니아의 신상(神像) 조각과 다를 것이 없다. 더 군중을 모으고, 더 많은 수익을 내는 비즈니스가 될수록, 더 무의미하고 더 불행해진다. 진공상태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도록, 도수를 높여가면서 진통제를 투여하는 우상의 계보의 연장일 뿐이다.
자유로 가정되는 헛것, 말뿐인 해방이라도 빨아대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내면의 진공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은 베이유에 의하면 ‘초자연적인 양식’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 길은 지각이 단테의 『신곡』에서처럼 아홉 개의 천계를 거쳐 제10 하늘인 ‘광명천(光明天)’을 지향하고, 빛나는 성인들이 앉아있는 천상의 계단을 향해 나아갈 때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놀랄 필요는 없다. 그렇게 하는 초자연으로의 길은 우리 가까이에 있다. 그것은 우리 목의 동맥에서 감지되는 생명의 파동보다 더 가까이에 있다. 그것은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길이다. “네 자신으로 돌아가라. 인간의 내면 속에 진리가 거한다.” 그것은 우리 내면에 있는 슬픔, 죽음의 슬픔을 마주하는 것이다. 서구 근대조각은 물성과 형식에 매몰된 결과, 그것들을 우상의 자리에 앉힘으로써 바빌로니아의 신상조각보다 더 어리석은 노선을 택했다. 미니멀리즘이나 컨셉츄얼리즘 조각도 이 범주에서 예외가 아니다.
조각의 모국어 : 마름과 갈라짐 또는 “네 자신으로 돌아가라”
모든 나무는 갈라지고 살이 튼다. 벌목되고 가공된 이후로도 죽어가는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 그런데 그것은 나무의 고유한 형질이요 속성이다. 그것은 ‘자연의 이치’를 따르고 ‘시원의 시간’에 동참하려는 나무의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동시에 그것은 나무를 깎는 조각가의 실체이기도 하다. 이것이 조각가가 그것(나무)와 마찬가지”라는 인식을 획득하는 지점이다. 인간의 몸도 생명의 이치를 따라 마르고 틈새가 벌어지면서 시원의 곁으로 다가선다.
조각가가 나무를 깎는 것은 신의 형상을 만드는 것도, 물성의 덧없는 선언서를 발부하는 것도, 사업가적 기질을 발휘하는 것도 아니다. 조각가의 일은 자신이 깎는 나무에서 나무를 깎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고, 나무와 자신의 슬프고도 행복한 연대감을 알아나가는 일이다. 나점수 작가는 “갈라진 틈 사이로 계절이 스미는 모습”을 본다. 빛이 머물고, 어둠이 드리워지는 모습, 바람이 스치고, 빗물이 스며드는 모습을 본다. 갈라진 틈 새로 그렇게 갈라지지 않았다면 마주할 수 없었던 것들이 꿈틀댄다. 생명이 실체로서 모습을 드러내고, 무명씨인 죽음의 찰나적인 현시의 순간이다. 그것은 생명이, 운명과 필연성이 동시에 현시되는 찬란한 슬픔이다. 이에 대해 나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가끔씩 ‘슬픔은 신에 가깝다.’라는 말을 떠올리곤 한다. 그럴 때면 내 태도와 행위를 거친 조각과 물질이 처한 ‘정신의 위치’는 무엇에 가까운지 생각하게 된다.”
나무의 마름과 갈라짐, 그 틈새에 드리워지는 어두움과 빛의 깊은 묵상으로 보는 이를 이끈다. 잠의 신 힙노스를 깨우자! 들이마셨던 레테의 강물을 토해내야 한다. 방황과 표류의 시간을 아프게 곱씹자. 그 틈새에서 음모와 질투에 대한 빛의 통찰이 촉진되고, 그 순간 찬란한 슬픔의 시간이 다시 흐른다. 그곳에 깃든 어둠이 손을 흔든다. 신(神)과 국가와 돈을 위해 나무를 깎는 자리에서 벗어나라고 신호를 보낸다. 나무를 매매 계약서를 위해 사용하는 것과 땔감으로 사용하는 것 사이에는 별반 차이가 없다고 나무가 말하는 소리를 듣자. 고대 바빌로니아 왕국의 신상 조각가와 21세기의 독립비즈니스 생산자로서 조각가 사이에는 무시해도 될 만큼 미미한 진화가 있을 뿐이라는, 조각의 역사로부터도 듣자. “이 숲에서 벗어나 살고 싶은 자, 누구든 다른 길을 가야 하나니... 지혜와 사랑과 덕을 양식으로 삼아.”(베르길리우스(Publius Vergilius Mar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