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피 개인전: 미래 생물 발굴

Fi Jae LEE: Excavating Future Species

Artist

이 피
Fi Jae LEE

Title

미래 생물 발굴
Excavating Future Species

Date

2023.08.25 (FRI) - 09.16 (SAT)

Performance

2023.09.07 (THU)

More Inquiries: seoul@artspace3.com

Credit

디렉터 이숙희
큐레이터 박주희
어시스턴트 큐레이터 문채원
글 이연숙(리타)
그래픽 디자인 장윤아
사진 전병철
번역 김미정

Director Sookhee Lee
Curator Joohee Park
Assistant Curator Chaewon Moon
Text by Lee yeonsook(Rita)
Graphic Design by Yuna Jang
Photography by Byungcheol Jeon
Translated by Mijung Kim  
이피 기계
이연숙(리타)


이피의 작업에서 첫 눈에 들어오는 것은 분명 그것의 시각적 그로테스크함이다. 그러나 이 그로테스크함은 그가 작업을 통해 (여성이라는) 타자의 몸과 그 몸의 괴물성이라는 주제를 다루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보다 그의 작업 전반을 이루는 단위인 과도한 디테일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다. 오랜 시간에 걸쳐 강도 높은 손 노동을 통해 제작되는 그의 회화는 단순한 도형의 조합으로 구성된 상징적인 지물들로 빼곡하다. 마치 신화적 알레고리처럼 보이는 회화 속에서 인간 혹은 외계의 신처럼 보이는 사지 달린 형상의 부분적인 대상들이 해체되고 전치되고 반복되어 등장한다. 《미래 생물 발굴》이라는 전시 제목처럼 이피의 회화는 ‘아직’ 우리가 모르는 어떤 존재의 기원을 연상하게 만드는 기이한 감각을 생성한다. 한편 출토된 고대적 유물을 연상 시키는 그의 조각 역시, 수공예적인 동시에 강박적인 수위의 작은 부분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작은 조각들은 금속성의 촘촘한 비늘 혹은 깃털, 때로는 피뢰침처럼 삐죽 튀어 나온 가시로 이루어진 표면을 하고 있다. 우리가 지구 환경에 인류가 큰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지질 시대를 ‘인류세’로 분류하는 것처럼, 이들 조각은 작가에 의해 “현생누대 신생대 이피세”라 불리는 세계관 속에서 채집되어 그 형태와 이름을 얻게 된, (한때) 이피의 일부였던 무엇이자 상상적인 생물 종이다. 이피의 회화가 ‘아직’ 없는 기원을 다루는 것처럼 보이는 반면, 그의 조각은 (우리가 사는 세계에) 출현함과 동시에 ‘이미’ 박제되어 버린 “이피세” 속 생물 종들의 희안한 팔자를 관조하는 듯 보인다. 아니 어쩌면 연민에 가까울까? 사실, “이피세” 속 생물 종들로부터 ‘인류세’ 속 인간 종의 운명을 겹쳐 보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다.

코 끝을 바짝 들이대 그것의 세부를 골똘히 쳐다 보게 만드는, 그의 회화와 조각 모두에서 발견되는 노동 집약적인 패턴은 일견 종교적인 자기 수행의 일부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마음을 비우게 만들기에는 너무 변칙적이고, 화려하고, 장식적이다. 다시 말해 이피의 손 노동의 남긴 흔적들은 빈 공간을 채우는 고통보다도 새로운 형상을 발명하는 쾌락을 상상하게 만든다. 한편 이피가 과도하게 묘사하는 회화와 조각의 디테일들은 작아도 너무 작다. 이들은 너무 광대해서 인간 이성의 의미 체계 안으로 포획될 수 없는 숭고한 대상들과 반대로, 너무 작아서 해석의 뜰채 사이로 빠져 나갈 수 밖에 없는 반-숭고한 대상처럼 보인다. 마치 부분의 형태가 전체의 형태로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구조인 프랙탈처럼, 이피의 작은 세부들은 고정된 의미를 붙잡으려는 해석학적 충동을 교란시키며 영원히 자기 해체를 반복할 것만 같은 착시를 불러 일으킨다. 이들은 스스로 쪼개지고 또 쪼개지면서 의미로 환원될 수 있는 가장 작은 단위의 단서조차 남기기를 거부한다. 이피의 회화와 조각에서 발견되는 이러한 반-숭고적인 세부들은 근대 주체를 형성한 중요한 원리인 시각중심주의의 관점에서는 결코 온전히 파악되거나, 분류되거나, 해석될 수 없는 공포스러운 잉여로 남는다. 광대한 바다와 무한한 모래를 ‘셀 수 없어서’ 패닉에 빠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지나치게 작아 ‘셀 수 없는’ 것에 대해서도 똑같이 반응할 수 있다. 그러므로 반복건대 그의 작업이 그로테스크함과 관계한다면 그것은 그가 만들어내는 형상들이 괴물적이어서가 아니라 그것을 이루는 단위가 지나치게 작기 때문이라는 임시적인 결론이 가능해진다.

그렇다면 이피가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적으로 만든다는 회화의 본령(파울 쿨레)을 비틀어,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적인 것을 통해 (다시) 비가시적으로 만든다고 말해도 좋을까? 그의 작업을 인습적인 시각 예술의 독해 방식으로는 결코 ‘해독’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또한 그의 손 노동이 시각적 재현 체계에 충실히 복무하기보다 촉각, 때로는 후각과 미각과 같은 소위 ‘열등한’ 감각들을 자극하는 데에 더 큰 관심을 보인다는 사실을 참조하자면 더욱 그렇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의 작업이 그간 종종 ‘아브젝트(abject, 비체) 예술’의 맥락에서 설명되어 왔다는 사실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페미니즘 예술 비평에서 특히 그 중요성이 강조되어 온 아브젝트는 한 개체가 말하는 존재로서 상징계에 진입하기 위해 억압 해야만 하는 모체와의 결합 상태를 떠올리게 만드는 대상, 또는 그러한 대상으로 인해 촉발된 몰아적 상태를 뜻하는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개념이다. 아브젝트는 주로 신체 분비물을 가리키지만, 그것이 자아와 타자를 가르는 경계를 흐리는 효과를 불러 일으킨다는 의미에서 (서구-남성-시각-로고스중심주의적) 문화에서 추방되고 배제되어온 감각적 대상들을 모두 포함한다. 그러므로 강렬한 오징어 냄새를 풍기는 이피의 <승천하는 것은 모두 냄새가 난다 No.1>(2010)이나 황태포와 레이스로 만들어진 <날개를 위한 맞춤복>(2011)은 ‘아브젝트 예술’의 ‘적절한’ 예시처럼 이해될 수 있다. 조각적 묘사를 통해 따갑거나 거칠거나 오돌토돌한 촉각적 감각을 불러 일으키는 이피의 <현생누대 신생대 이피세 대백과> 시리즈나 <나의 나방>(2019), <출토된 할머니의 다정한 영혼과 순장된 새들>(2020)의 경우는 또 어떤가. 이들 조각들은 고상한 거리 두기를 가능하게 만드는 미적 대상의 자리에 머무는 대신, 만져보고 싶은 충동을 불러 일으키는 자신의 독특한 물성을 고스란히 노출하며 우리의 자아를 감싼 경계인 피부를 곧장 감각하게 만든다. 그러니 ‘아브젝트 예술’이라는 예술사적 범주는 반/비-시각성을 중심으로 이피의 작업을 맥락화하려 시도하는 (나 같은) 비평가들에게는 참으로 알맞은 틀거리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정말 그게 다인가?

고등학교 1학년이던 1997년 서울의 미술계에서 첫 데뷔전을 치른 이래로 이피는 그간 드로잉, 회화, 조각, 설치, 퍼포먼스 등 매체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방식으로 작업해왔다. 종교와 신화, 심해 생물과 서브 컬처에 이르는 폭 넓은 관심사를 작업에 직/간접적으로 녹여 내며 작가로서의 세계관을 수직으로 또 수평으로 넓혀온 이피의 행보를 요약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가 자신의 작업을 ‘미술계’라는 장에 진입 시키기 위해 작가들이 취하기 쉬운 전략인, 세상이 ‘시의적’이라고 간주하는 개념을 작업 앞에 내세우지 않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오랫동안 ‘여자’가 등장하는 작업을 해왔지만 그것을 ‘페미니즘’이라는 (구태여 말할 필요도 없어서 그랬겠지만) 이념을 앞세워 말하지 않고, 또한 “이피세”의 생물 종들과 같은 비인간 존재자들의 형상을 구현해왔지만 ‘타자’나 ‘윤리’와 같은 ‘큰’ 개념들을 끌어오지 않은 까닭은 아마도 그가 그런 식으로는 작동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작업실에 방문한 날 그는 내게 자신의 몸을 이루는 “수천의 몸”에 대해 말해 주었는데, 나는 그 말을 그가 감각하고 경험하고 기억하는 타자적인 것들의 자국을 자신의 몸 속에서 먹이고 기르고 배양한다는 말로 이해했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수천의 몸”이 다글거리며 거주하는 그의 몸은 폐와 심장, 위와 장으로 이루어진 유기체의 몸인 동시에 무지막지한 수용력과 생산력을 자랑하는 하나의 거대한 기계이기도 하다. 충분한 숙성 과정을 거쳐 이피라는 이름의 기계 속에서 분쇄되고, 혼합되고, 재조립되는 과정을 거쳐 완전히 새로운 형태로 세상 바깥으로 재생산되는 이 타자적인 것들은 사실상 그 어느 것도 처음 그것과 같지 않다. 이들은 자신의 고유한 기호 체계와 시각적 논리를 따르는 기계의 서명 아래 드로잉으로, 회화로, 조각으로, 퍼포먼스로 변형되어 재탄생한다. 예술가로서 이피가 존재하는 방식은 이처럼 하나를 다른 하나로 재창조하는 기계의 논리를 따르는 것이며, 영원히 반복되는 탄생과 소멸의 순환을 자신의 몸이라는 매개를 통해 상연하는 생명의 논리를 따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피의 작업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 중요한 것은 예술사적 관점에서 그의 작업이 속할만한 적절한 좌표를 구해내는 것이라기보다(물론 필요한 일이지만), 마치 숨을 쉬고 내뱉듯이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만드는 그의 행위가 생성하는 운동성을 포착하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이번 개인전을 보자. 《미래 생물 발굴》은 그간 이피가 매일 일기처럼 그려온 드로잉, 회화와 조각 뿐만 아니라 퍼포먼스 <음식물의 환생>을 포함하고 있다. <음식물의 환생>은 “죽은 몸들이 모이는 장소”이자 “이미지가 태어나는 곳”, 그러므로 “죽은 생물의 몸이 새로운 이미지로 환생하는 공간” 인 식탁을 전시장 내부에 구현하고, 관객들을 참여자이자 예술가로서 식탁에 초대하고, 그들이 먹은 “죽은 생물의 몸”을 그들로 하여금 “새로운 이미지”로 제작하게 만드는, 하나의 식사-의례이자 관계 미학적 퍼포먼스다. 우리가 매일 먹는 “죽은 생물의 몸”이 소화를 거치며 영영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몸이라는 기관에 접속함으로써 에너지를 제공하는 연료로 변형되고, 이를 통해 하나의 아이디어 또는 하나의 행위로서 다시금 태어난다는 이피의 발상에는 “인류세의 장례식”에서 기대되는 상투적인 비통함이 없다. 왜냐하면 그건 슬프기만 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천의 몸”이 이피라는 예술가-기계를 통과해 작업이라는 형태를 입고 다시 출현하게 되는 것처럼, 이미 도래한 인류세의 끝에서 “죽은 생물의 몸” 그리고 우리 자신은 삶과 죽음이라는 거대한 순환의 일부로서 또 다른 탄생을 예비하게 만드는 재료가 된다. 아마도 퍼포먼스의 과정 중에서 전시장은 이피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거대한 기계가 된 것처럼 보일 것이다. 내부가 텅 빈, 들어간 것이 나가고 나간 것이 곧 들어오는 이 기계는 시작과 끝이 같은 운동을 반복한다. 부분의 형태가 전체의 형태를 되풀이하는 프랙탈과 같이. 
The Machine, Fi Jae LEE (ENG)
Lee Yeonsook (Rita)

The visual grotesqueness in Fi Jae LEE's work is the first thing that catches your eye. This grotesqueness stems not only from the fact that her work deals with the subject of the others’ body (as a woman) and its monstrousness, but also from the excessive detail of each individual artwork element that forms her overall work. Her paintings, produced through intensive manual labor over long periods of time, are filled with symbolic objects composed of simple combinations of figures. In her paintings that resemble a mythical allegory, partial objects of four-limbed shapes that are suggestive of human beings or alien gods appear dismantled, transposed and repeated. Like the title of the exhibition, Excavating Future Species, Lee's painting creates an uncanny sense that reminds us of the origin of some existence we don't yet know. Her sculptures, reminiscent of ancient excavated relics, are likewise created from small pieces on an obsessive but crafty level. These tiny pieces have a metallic surface of dense scales or feathers, sometimes with thorns shooting out like lightning rods. Just as we classify the geological age when mankind began to have a great influence on the global environment as the ‘Anthropocene’, these fragments are imaginary species and what was (once) part of Fi Jae LEE, since they got their name and form due to the artist in a worldview called ‘Phanerozoic Eon, Cenozoic Era, Leeficene’. While Lee's paintings seem to deal with origins that have not yet come to pass, her sculptures appear to be contemplating the strange fate of species in the ‘Leeficene’ that are ‘already’ taxidermied as soon as they emerge. Perhaps it's more of a pity? In fact, it is difficult not to overlap the fate of the human species in the ‘Anthropocene’ with that of the species in the ‘Leeficene’.

The labor-intensive pattern found in both her paintings and sculptures makes our eyes become closely glued to its details, initially seeming to be part of a religious self-performance. However, they are too anomalous, too colorful, and too decorative to clear the mind. In other words, the traces of Fi Jae LEE's manual labor make us imagine the pleasure of inventing novice shapes rather than the pain of filling empty space. On the other hand, the details of paintings and sculptures that Lee excessively portrays are small—intensely too small. They seem to be minute, anti-sublime objects that are so small they end up slipping through the filter of interpretation, quite contrary to sublime objects that are too vast to be captured within the semantic system of human reason. The small details of Fi Jae LEE’s work disturb the hermeneutic urge to hold on to a fixed meaning, just like a fractal, in which the form of the part is constantly repeated in that of the whole. This urge creates an optical illusion that seems to continuously repeat self-dissolution. The details of Lee’s work refuse to leave even the smallest element of clues that could turn into some semblance of meaning by being repeatedly divided. These anti-sublime details found in Fi Jae LEE's paintings and sculptures remain as a terrifying surplus that can never be fully grasped, classified, or interpreted from the perspective of visual centralism, an important principle that helped form the modern subject. Just as we panic at the 'uncountability' of vast seas and infinite sand, we can react equally to 'uncountable' objects because they are too small. Therefore, once again, if her work relates to grotesqueness, we could possibly draw a temporary conclusion that it’s not because the figures she creates are monstrous, but because the elements that make them up are extremely small.

By twisting Paul Klee’s statement that art makes the invisible visible, can one say that Lee makes the invisible invisible again through visible objects? In other words, we can never ‘decode’ her work in a conventional visual art reading method. Additionally, this all the more refers to the fact that her manual labor shows greater interest in stimulating so-called ‘inferior’ senses, such as touch, smell and taste, than in serving faithfully in the methodology of visual reproduction. If so, we need to point out the fact that her work has often been explained in the context of 'abject art'. The ‘abject’, whose importance has been particularly emphasized in feminist art criticism, is the concept of Julia Kristeva. Abject art refers to objects that remind us of the state of union with our mother that must be repressed to enter the symbolic order as a speaking subject, or to enter the self-effacing state triggered by such an object. The ‘abject’ here mainly refers to body secretions, but includes all sensory objects that have been expelled and excluded from the (Western-male-visual-logos-centered) culture in the sense that it has the effect of blurring the boundaries between self and other. Therefore, Lee's Everything Ascending to Heaven Smells Rotten (2010)—giving off a strong smell of squid—or The Custom Dress for Wings (2011)—made of dried pollack and lace—can be understood as an ‘appropriate’ example of abject art. Consider Fi Jae LEE's Phanerozoic Eon, Cenozoic Era, Leeficene Encyclopedia series, which evokes a harsh, rough or bumpy sense of touch through sculptural description, such as My Moth (2019) and The Excavated Souls of My Kind Grandma and Birds Buried Alive with Her (2020). Instead of staying in the place of an aesthetic object that enables elegant distancing, these pieces make the skin—the boundary surrounding our ego—immediately feel, exposing their unique physical properties that evoke the urge to touch. Therefore, the historical art category of ‘abject art’ seems to be an extremely suitable framework for critics (like me) who attempt to contextualize Fi Jae LEE's work around anti/non-visualism. However, is that truly everything?

Since her debut in Seoul's art world in 1997 when she was only a freshman in high school, Fi Jae LEE has been working in various ways, including drawing, painting, sculpture, installation and performance, regardless of media. It is not easy to summarize Lee's approach to expand her worldview vertically and horizontally by directly or indirectly melting a wide range of interests—extending from religion and mythology to deep-sea creatures and subculture—into her work. This is all the more so because she employs a difficult strategy, not putting the world’s current trends in front of her work, which is the attitude from artists who are trying to make their debut into the ‘art world’. Although her work has included ‘women’ as subject matter for a long time, she has not presented it with the ideology of ‘feminism’ (which should go without saying). Likewise, she has embodied the image of non-human beings such as the species of ‘Leeficene’, but has not used ‘big’ concepts such as ‘other’ and ‘ethics’. This is likely because it’s not the way she works. On the day of my visit to her studio, she told me about the "thousands of bodies" that consist of her body, which I understood as her feeding, growing and cultivating traces of things from others that she senses, experiences and remembers in her body. From this point of view, her body, where the crowd of "thousands of bodies" dwells together, is an organism’s body consisting of lungs, hearts, stomachs and intestines, and is also a huge machine with enormous capacity and productivity. None of these distinctions is actually the same as what they were at first—through a process of sufficient ripening—after they are reproduced into a completely new form for the outside world by being ground, mixed and reassembled in a machine named Fi Jae LEE. They are transformed into drawings, paintings, sculptures and performances under the signature of this machine that follows its own system of symbols and visual logic and are reborn. The way Fi Jae LEE exists as an artist follows a mechanical logic that recreates one into the other, and follows the logic of life that performs the cycle of birth and extinction that is repeated forever through the medium of one's body. Thus, what's important in understanding Lee's work is not only to calculate exactly where she stands in regard to her work (though this is necessary), but also to capture the mobility that her act of drawing and sculpting creates, just like breathing and spitting out.

In the same context, let's explore this solo exhibition. Excavating Future Species includes not only drawing, painting and sculpture that Lee has produced daily, like a diary, but also a performance: Food Reincarnation. Food Reincarnation is a meal ceremony and a relational aesthetic performance that materializes the table inside the exhibition hall, which is a "place where dead bodies gather" and "a place where images are born", and therefore "a space where dead creatures' bodies are reborn into new images." The performance invites the audience to the table as participants and artists, making them create a ‘new image’ out of the ‘dead creature’ they ate. Lee's idea is that the "dead creature's body" we eat every day does not forever disappear through digestion, but is transformed into an energy-providing fuel by connecting to an organ called our body. Thereby being reborn as an idea or an act, it has no conventional grief expected from the ‘funeral of the Anthropocene’. This is because it's not all sad. Just as "thousands of bodies" reappear in the form of work through a machine called Fi Jae LEE, "dead bodies of living things”—and we ourselves—are part of the huge cycle of life and death, which prepares us for another birth at the already-arrived end of the Anthropocene. Perhaps during the course of the performance, the exhibition hall itself seems to have become a huge machine, just like Fi Jae LEE. In this machine, which is hollow inside, what goes out directly comes in again, repeating the movement that has the same beginning and end, like fractals where the form of the part repeats that of the who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