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 yi

ARTIST
김 주 현
Kim Joohyun
문유소
Moon Yooso
윤정민
Yoon Jeongmin
장도은
Jang Doen
제갈선
Sun Jaegal
TITLE
fe, yi
DATE
2024.03.26 (화) - 04.23 (화)
OPENING RECEPTION
2024.03.30 (토) 17:00
CREDIT
기획: 박주희 (아트스페이스3 큐레이터)
주최 및 주관: 아트스페이스3
디자인: 장윤아
사진: 전병철
≪fe,yi≫ 전시 서문 
≪fe,yi≫는 'fey'와 'fei'의 합성어이다. 영단어 ‘fey’는 ‘약간 특이한, 비현실적인’이라는 뜻이며, [fei]로 발음되는 중국어 飞는 ‘날다' 라는 뜻을 갖는다. ‘날아가는 것’은 자유로운, 열린 주체, 연속적인 움직임에 대한 상징적 이미지를 품고 있다. [fei]는 중국어의 4가지 성조 중 평성(1성)으로 숨을 깊게 내뱉어야 하는 긴 단어이다. 제목은 이처럼 여러 차례의 이유와 긴 과정을 갖는다. 작가들의 작품 또한 ‘물질’을 넘어 ‘과정’, ‘의도', ’맥락' 등을 여러 번 통과하며 복수적 의미를 갖길 바란다. 이러한 이유로 이번 전시는 단일한 방향을 벗어난 가능성을 품고 있는 상태의 작품, 위도 아래도 없는 그리기, 유동적 이동을 하는 작품을 소개한다.

전시는 영원히 존재할 수 없고, ≪fe,yi≫도 잠시 여기 머물 뿐이다. 그래서 전시가 구성되고 작품을 담아내는 과정을 되돌아보고 주의 깊게 살폈다. ≪fe,yi≫는 물리적 결과를 넘어 전시를 위해 존재했던 과정을 조금씩 쪼개어 드러내고자 했다. 예를 들어, 작업 과정을 전시 공간에 재현해 보거나, 전시 구상 스케치를 포스터에 숨겨 놓거나, 지나간 대화를 적어 보는 것이다. 해체되어 나타나는 과정의 시간 조각들로 전시장 풍경이 조금은 다층적이고 연속적으로 보여지길 의도했다. 이때 무질서함이 아닌 부드럽고 완곡하게 해체되는 이미지를 떠올렸다. 이번 전시를 준비하며 정리된 하나의 작품으로 발화되지만, 복수성을 드러내는 작업을 소개하고 싶었다. 그렇기에 이 전시는 간단명료하게 정의되기 어려울 수 있다. 애초에 하나의 단어로, 문장으로 정리되지 않길 바랐다.

독일 극작가인 고홀트 에프라임 레싱 Gotthold Ephraim Lessing은 ‘시간에서의 연속성은 시인의 역할이고, 공간에서의 공존은 미술가의 역할이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우리는 작품의 여러 의미를 공간에 새기기 위해 대화를 나눴다. 단 하나의 갈래를 없애고자 하는 의지와 전시를 단순명료하게 해석하지 않기 위해서 상상하고, 질문하고, 그려보고,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우리의 시각적 메모와 대화의 파편을 없애지 않고 여기에 펼쳐 놨다. 하나보다 무한히 많은 곳으로 바라보길 바라며. 그렇다면, 전시 제목을 약간 이상한 날기의 동작 정도로 해석하면 어떨까.
작품을 수평적으로 볼 수 있게 하기
김주현의 작품은 중력에 의해 흐르는 물감의 운동성을 담고 있다. 캔버스를 기울이며 자연발생적으로 물감의 흔적이 남게 하는 그의 기법은 목적이 아니라 그 자체로 작동한다. 수평으로 놓인 캔버스를 움직이며 수백 번 물감을 흘리는 반복은 결과를 예측하긴 어렵지만 과정이 고스란히 남아 의미가 된다. 이번 전시에서 그의 작업이 행해지는 높이에 일부 작품을 수평으로 걸었다.
또한, 그는 자연의 물질성과 질감에 대해 이야기해 주며 물감의 질감이 자연으로 온 듯한 감각을 자극하길 바란다고 설명했다. 의 표면은 나무껍질, 나무의 결을 갖고 있다. 의도와 우연이 섞이며 만들어진 화면은 자연과 같이 그의 의도대로 완전히 통제되지 못한다. 그는 완성된 화면을 본 다음 작품의 제목을 결정하는데 그가 느끼고 직접 본 자연의 풍경을 기반으로 한 제목을 만든다. (Bark),(Wood Grain),(Seashore)등 그가 만든 제목은 자연에 접촉하며 발생한 경험을 반영하고 있다.
그의 작업 과정은 손에 의해 이루어짐과 동시에 작가 바깥인, 외부 힘에 의해 인도된다. 자연의 방식과 같이 작위적이기보다 시각적 공간으로 자연스럽게 남는다. 완성된 작품의 캔버스 위에 남은 화면은 상하 구분 없이 중력을 벗어나고, 소실점도 사라진 상태이다. 나는 그의 작품은 한계를 짓지 않으며 끊임없이 퍼져 나가고, 마음껏 날 수 있으며, 여러 갈래의 방향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시간순으로 진화하듯 배치하기 <br>
문유소는 회화의 제한된 조건 안에서 내부-내면 혹은 캔버스의 안-의 균열과 다중적 차(差)를 드러내는 능력을 가진 흥미롭고 복잡한 예술가라고 생각했다. 이번 전시에서 그는 처음으로 초기작부터 신작까지 작업 전반을 보여준다. 그의 행적이 한곳에 모였을 때, 마치 그들이 증식하거나 진화하는 것 같은 상황이 일어나길 기대한다.
시리즈 설명:
(each different process but sharing family tree)는 회화의 분산된 에너지를 표현하고자 하였으며, 해당 시리즈 작업을 동시에 여러 작품을 진행하며 작품 간 영향을 주고, 모방하며 증식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 (gathering: zoom in)은 그는 회화에서 어떻게 에너지가 응축되는 지를 탐구하기 위해 그는 매뉴얼을 만들었다. 매뉴얼에 회화의 조건을 달고 ‘스스로를’, 그리고 물질과 매체로서 ‘회화’를 규제하였다.
➝ (X...siblings or not)은 X자의 도상에서 출발하였다. X가 갖는 미지의 존재로서 상징성을 품고 있으며, 배경과 풍경의 경계에 대한 고민을 담았다.
➝ 가장 최근 시리즈인 <증상적 아우라>에서 그는 집적된 레이어의 표면 안에서 트라우마처럼 과거의 밑면이 돌아오는 것을 발견하였고 그 지점을 강조했다.
변화무쌍한 방향성을 띠는 선과 자신이 만든 회화의 구조 속에서 힘을 포착하거나 이완시키는 등 그가 조직한 시점에 의한 화면은 에너지로 발산된다. 그의 추상적 제스처들은 교차하여 무한한 깊이를 갖게 되고, 물감 덩어리는 하나와 또 다른 하나 사이의 끊임없는 교환을 일으킨다. 나는 생소한 추상적 깊이를 들여다보며 회화의 시점과 깊이를 역추적한다. 그의 회화는 굉장히 실험적 성장을 해내는데, 성장의 방향은 사방으로 뻗어 나가고, 회화는 영향력을 미치는 존재로, 자율적인 상태로 성장하는 것 같았다. 그가 행하는 비순차적인 그리기는 물감과 물감 사이의 연속이며, 여기에 모인 과거에서 현재까지의 작품은 여럿이면서 큰 하나가 된다.
조각을 드로잉처럼 보이게 하기
윤정민의 조각은 드로잉에서 출발한다. 드로잉을 그린 후 조각으로 만들고자 하는 드로잉을 선택한다. 선택한 드로잉을 대조해 보며 철로 조각한다. 그의 조각은 드로잉과 마찬가지로 선으로 시작된다, 선으로 양감을 만들어내고, 레이어를 중첩해 내며 공간에 새긴다. 그 위에 드로잉의 지지체였던 종이를 조각에 얹어 면을 만든다. 일반적으로 종이는 연약하지만 그의 조각에 놓인 종이는 단단하다. 철과 종이 등의 재료가 결합된 복합적인 질감과 혼합적인 형식을 갖는다.
그의 조각 작업은 선으로 출발한다는 점에서 드로잉과 유사하지만 드로잉을 공간에 옮겨내는 작업은 그에게 다른 힘과 감각을 요구한다. 드로잉과 달리 조각은 어떤 물질이든, 어떤 무게이든 공간에서 발생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조각은 막힌 공간을 갖고 있지 않다. 철이 만든 선제 사이로 틈이 있다. 하나의 완결된 조각인 동시에 그의 조각은 공간을 포괄하고 그의 조각이 차지하는 공간성은 계속해서 확장된다. 그의 조각은 공간과 완전히 분리되지 않고, 공간을 함께 나누며 공간과 관계 맺고, 주변을 구별하지 않으며 독립적 개체로서 존재함과 동시에 열린 상태로 남는다. 이번 전시에 새 조각이 있다. 그가 바라본 새는 “둥지를 트는 새, 그리고 자신의 집 창문에 부딪혀 죽어버린 새, 집을 지키는 거위” 등이다.
나는 그가 새를 통해 계속해서 ‘집’을 언급함을 알 수 있었다. ‘집’은 오래전부터 작가의 내면을 표현하는 수단이었으며 가장 내밀하고 사적인 곳으로 해석되었다. 이는 그가 계속 지속하는 메시지인, “극히 개인적인 내용이다, 대단한 내용은 없다. 일상을 표현한다”라는 작업 주제로도 연장된다. 그는 계속해서 특별하지 않을 수도 있는 존재를, 보통의 일상적인 것을 주목한다. 그의 작업은 조각과 드로잉 사이를 경유하며 드로잉으로, 조각으로 혹은 새도, 집도 될 수 있을 것이다.
세모의 영역 확보하기
장도은의 조각은 전통 재료와 방식을 사용하는 정교한 인체조각과 전통 재료를 벗어나 패브릭으로 단순화된 신체 이미지 전체 혹은 일부를 가진 조각으로 크게 분류될 수 있다. 다양한 재료의 접목과 파편화된 인체 조각의 접합은 비정형적 ‘순환’ 체계를 갖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 그의 조각이 자유롭게 이동하고 해체될 수 있는 점을 고려하여 그만의 영역을 확보하였다. 특별히 삼각형 좌대를 놓았는데 숫자 ‘3’은 평면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다각형이 될 수 있는 최솟값이며, 복합적이고 다면적인 관계가 일어날 수 있는 경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의 조각은 해체되고, 분리가 가능하다. 재조합되면서 다양한 형태로 변이하여 예측 불가능한 유동적인 형태를 취한다. 몸의 일부를 절단하는 과정은 인체 조각이 본래 추구했던 완전한 신체가 갖는 숭고함으로 한 발짝 멀어지게 한다. 불완전한 인체 조각은 몸을 편집하고 뒤엉키게 한다. 패브릭 조각의 형상은 귀여움을 갖고 있다. 귀여움은 일반적으로 “아름다움, 숭고, 아우라, 강함”과는 거리가 있다. 작고 무력한 이 귀여운 존재의 머리를 떼어냈다 붙였다 하는 과정은 기괴하다.
그는 인체 조각뿐 아니라 조각을 위한 부수품에도 관심 갖는다. 일반적으로 좌대는 견고하고 높은 모양으로 조각을 놓는 부수품으로, 조각이 돋보이기 위해 하얀 단상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그의 출품작 중 <꾸며진 좌대>는 좌대에 제목을 붙이고 조각과 같은 위상으로 좌대를 바라보고 있다. 또한 그의 최근작인 모루 시리즈는 대장간에서 불린 쇠를 올려놓고 두드릴 때 받침으로 쓰는 도구로 보충적인 역할을 갖고 있지만 그는 모루를 작품으로 완성했다. 주된 것에 도움을 주는 도구(좌대와 모루)를 조각으로 끌어오는 시도를 해내며 전통적인 조각 개념에서 또 한번의 탈피를 해낸다. 그의 조각은 단 하나의 조각에서, 다른 조각과 함께 있고, 조각 안에 조각이 있고, 조각을 상실하기도 하고, 정지 되어있지만, 언제나 해체될 수 있는 복수적 해석의 가능성을 볼 수 있다. 
약간 어긋나게 놓기 
제갈선과의 대화에서 우리는 유한한 신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람은 몸에 갇혀 있으며, 몸에 의해 삶은 지속되기도 하고 멈추기도 한다. 몸안에서 삶과 죽음을, 운명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은 환상일 뿐이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 환상을 자주 망각하며, 죽음과 그 공포를 부정한다. 그는 신체에 의해 자유가 제한되었다는 진실을 텍스트의 표면으로 이동시키는 작업을 한다. 그에게 텍스트는 매끄럽고 아름다운 영원한 존재이며 그에게 텍스트는 ‘대체 신체’로 여겨진다. 나는 그가 텍스트를 번역한다고 생각하였는데, 회화에 새겨진 텍스트를 번역물로 본다면 그가 쓴 글과, 메모에서 지칭하는 특정한 뜻은 ‘원작’으로 볼 수 있고, 그가 해석한 ‘대체 신체’로서의 텍스트 그리고 표시되는 글자는 ‘번역물'이 된다.

원작    1. 텍스트가 본래 갖는 의미
번역물 2-1. 그가 바라보는 이상적 텍스트의 모습
           2-2. 회화에 새겨지는 글자, 텍스트의 형상

번역은 원작에서 번역물로 손실 없이 옮겨지는 일방적인 행위가 아니며 번역자의 창조적 작업이 된다. 종이에 텍스트를 천천히 그려내며 그의 행위가 의미를 갖게 될 때, 텍스트에서 파생되고 새로이 해석된 의미가 발생한다. 작업 방식 또한 그가 쓴 텍스트를 스캔하고 스캔된 사진을 보며 다시 종이로 경유시킨다. 텍스트를 스캔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움직임을 포착하고 그 안의 시간성을 회화에도 나타내고자 그는 삼면화 혹은 이면화 작업을 하는 등 그의 감각과 시선으로 작품에 개입한다.
이번 출품작인 ND 시리즈는 그가 이상 세계에 대한 염원을 담은 글에서 시작한다.

Double sided island
in fantastic fog,
When it turns blue,
Let’s dance
naked.

감정적 경험을 담은 텍스트에 쓰인 낱말과 단어를 왜곡하고, 부서뜨리고, 파편화하여 이미지화 한다. 그가 만든 화면은 텍스트로 읽히기 보다 분위기로 가득 찬 푸른색의 영원한 공간과 시간을 가진 곳으로 보인다. 은 로렘입숨 lorem ipsum 을 그린 것이다. 로렘입숨은 출판이나 디자인에서 폰트나 레이아웃 등의 예시를 보여줄 때 사용하는 더미 텍스트를 의미한다. 존재하지만 사라질 임시적 존재들이다. 그는 사라질 텍스트를, 유한한 신체로 바라보고 그 존재를 남기고자 했다. 푸른빛의 물감은 상처 속 붉음과 먼, 죽음과는 거리가 먼, 푸른 풍경의 텍스트 속으로 계속 이동한다.

글: 박주희 (아트스페이스3 큐레이터)

Installation Vie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