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동승 회화론 : 틀에 박히고 억눌린 것들에 화답하기
임동승은 대체로 2010년대 중반까지 회화적 완성과 관련된 방법적 확장에 천착했다. 그러다가 2016년에서 2017년을 지나면서, 그 자신이 ‘수행과정(performative process)의 탐구’로 표현하는, 일련의 새로운 회화 노선의 경작을 표방하고 나섰다. 이 회화론은 방법이나 기술로서의 회화를 넘어서는 것에서 시작해 회화적 장치를 문학적으로 운용하는, 또는 문학적 요소를 회화적으로 재배치하는 것으로까지 확장된다. 후자 역시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최근의 일련의 것들은 임동승의 사유적 소양에서 비롯되는, 더욱 진전된 참신하며 음미할만한 미적 성과들을 내어놓는다.
<수난극.A Passion Play>, <공룡과 의사당.Dinosaur and Capitol>, <전원의 합주 혹은 폭풍우.Pastoral Concert or The Tempest>, <죽음과 소녀들.Death and Girls> 같은 작품이 그것으로, 모두 2019년에 그린 신작들이다. 이 호명되고 문학적으로 조련된 이미지들의 출처는 어린 시절의 환상, 매스미디어, 무의식, 꿈으로 이어지는 너른 스팩드럼을 이룬다. 호명된 이미지들은 불특정한 시간과 장소들에서 행해진 자기수행적 회화의 여정에서 자주 임의적으로 수집되는 의미가 모호한 기록물들이다. <죽음과 소녀들.Death and Girls>이나 <수난극.A Passion Play>처럼 대체로 ’죽음과 관능에 대한 강박‘의 관념과 관련된 것이고, 그것들을 편집하고 재구성하는 방식은 예컨대 <공룡과 의사당.Dinosaur and Capitol>(2019)이나 <돌핀몬스터와 가면라이더.Dolphin Monster and Kamen Rider>(2017)처럼 대체로
헛헛한 아이러니, 유머의 기조, 희화화된 은유를 동반한다. 그것들이 내용이 명료한 메시지 구성이나 첨예한 해석에의 초대를 목적으로 삼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임동승의 회화가 스토리를 구성하고 전개하는 방법은 통상적 의미의 줄거리나 연출에 대한 혐의에 기반을 두면서, 명료한 전개나 식상한 결말과 결별하면서 기본적으로 수수께끼나 완성되지 않을 퍼즐방식을 선호한다. 불특정한 시간과 장소들에서 행해진 수행적 회화 여정에서 수집된, 모호성이 더욱 증폭된 기록물들을 통해, 메시지 구성이나 해석으로의 조급한 직진을 만류하고, 각각의 사건과 상황들의 뒤틀린 기입에서 기인하는 긴장어린 대기상태에 머물도록 하는 것이다. 사건들의 세부는 생략되고, 그것들의 관계설정은 추상적이다. 모호해서 명료한 사실관계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모든 개별적인 요소들은 사실적이지만, 그것들의 상호배치, 관계설정은 사실주의를 비켜나간다. 분명 무언가가 발화되지만, 그 내용은 수용자의 인식에 포섭되지 않는다. 결국 소통은 덜 종결된 채 미지의 어떤 지점을 배회한다. 부단히 시작될 뿐, 이야기는 결코 끝나지 않는다.
왜 그렇게 되어가는 것인가? 왜 그래야 하는가? 이성 자체가 치명적으로 손상된 상태라는 존 캘빈(John Calvin)까진 아니더라도, 세속의 보편 철학의 기반으로서 이성에 대한 신뢰, 곧 이성이 파악하는 명료한 것들로 행복한 삶을 건립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전제를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임동승이 근래 자신의 근래의 작업을 ‘완성’이라는 틀에 박힌 관념을 넘어서는 것으로 요약하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그 의미는 그가 언급했듯 ‘방법과 테크닉’ 측면에서의 완성, 즉 지극히 이성적으로 설계되는 ‘방법적으로 잘 구현된 회화’에 더는 연연하지 않겠다는 것으로, 작가는 그런 회화가 더는 자신에게 의미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방법이 궁극이 되는 자체의 공허, 테크닉으로서 회화의 덧없음에 더는 머물지 않겠다는 것이다. 사실 방법적 회화의 시도, 또는 스타일의 기반으로서 고유한 테크닉의 개발은 회화가로선 필연적으로 거쳐야 하는 단계이긴 하지만, 특히 형식주의 회화론을 잘못 소화한 이들에겐 치명적인 덫이거나 너무 달달해 빠져나가기 어려운 유혹이 되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생각으로 임동승은 “이제껏 피하거나 억눌러왔던 회화의 방법들에 기회”를 허용하는 노정, 즉 완성이나 결과에 대한 우려, 구성의 강박을 내려넣고 그저 마음이나 손가는 대로 따르기를 시도해오고 있는 것이다. 특히 <킥.Kick>(2017)이나 <녹색의 커어브.Green Curve>(2017) 같은 작품이 이러한 맥락에 보다 더 부합되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이러한 접근이 전적으로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전에도 이를테면 선과 형과 색의 비관례적 운용을 통해 습관적으로 익숙해진 것들에 대한 의구심이나 종종 시니컬한 코멘트를 내포하는 사물이나 대상의 윤곽을 흐릿하게 하거나 아예 없애는 등의 방법이 시도되었다. 의례히 생각 없이 따랐던, 미학적 경계와 회화적 범주들에 대한 의구심, 흐릿하게 하기, 모호성의 증가는 임동승의 회화에서 하나의 미적 저변으로 작동하고 있는 셈이다.
임동승 회화론의 미덕은 이 출처가 다양한 각각의 것들이 시각적으로 번역되고, 하나의 평면에 기입되는 과정에서 드러난다. 이 과정은 각각의 사건과 상황들이 “육체의 무게를 가진 무의식”, 또는 “질료적인 꿈” 같이, 그 안에 모순과 상치를 내포하는 것들로 되는 과정으로, 이를 거쳐 이야기의 사실성의 농도, 곧 구상과 추상, 명료와 모호 사이의 긴장의 수위가 조율된다. 여기서 관례화된 형식주의 규범들, 모던 페인팅의 얀센주의적 강령들은 크게 무의미하다. 연대기적 서열, 반듯한 플롯을 위한 예우 따윈 없다. 사실과 허구, 다큐멘트와 픽션, 심지어 3류나 B급으로 분류되는 것들에조차 조금도 배타적이지 않다. 그러면서도 무분별하고 지각없는 포스트모던미학적 관용으로 미끄러지는 것을 예방하는 어떤 회화적 긴강감이 작동한다. 붓 터치가 사실주의적 구현과 단편적인 단위로의 분절 사이를 오가면서 형성되는 균형에서 오는 긴장감이다. 인물과 사물들의 정체성은 일진일퇴를 거듭하면서, 그리고 대체로 스스로 흐릿해지거나 픽셀화되면서 회화적 긴장을 보다 팽팽한 것으로 만드는 데 기여한다.
임동승은 환상과 꿈, 일상과 미디어의 여정에서 가져온 미학적 요인들로 된 저글링을 즐긴다. 관람자(觀覽者)에게도 매우 즐거운 게임이다. 조르쥬 쇠라와 게르하르트 리히터 사이에서, 에드워드 호퍼적 실존주의 기질에 표현주의나 나비파의 색채 취향을 조미하면서, 그리고 베트남전이나 수난극에 포스트모던적 필터를 겹겹이 끼우기를 통해 드러나기 보다는 은폐되는 상황, 알고 싶지 않은 부조리, 불투명한 시각적 레이어, 진도가 나가지 않는 독해를 구성한다. 이 회화론은 사색의 결과를 정리해놓은 보고서로서의 그것과는 다르다. 이 회화는 사색의 과정 한 가운데를 여전히 지나는 중이다. 결론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며 적어도 아직은 그것을 논할 시점이 아니다. 이 회화는 출판이 완료된 단행본의 지면이 아니라, 지금 쓰여지고 수정되는 원고지와도 같다. 형식이 아니라 형식화하는 과정을 문제삼는 회화, 곧 자기수행의 탐구로서의 회화인 것이다. 관람자(觀覽者)의 일은 그 결과치를 숙지하는 것이 아니라, 주도적으로 그 결을 따라 동행하는 것이다.
심상용 (미술사학 박사/서울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