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직  
So near yet so far

ARTIST
김주연 Kim Juyon
노원희 Nho Wonhee
박미화 Park Miwha
캐롤린 앵거스 Carolyn Angus

TITLE
아 직
So near yet so far
DATE
2024.11.16 (토) - 12.14 (토)
* Opening Reception
   2024.11.16 (토)  5 pm
CREDIT
주최 및 주관 : 아트스페이스3 @artspace3_seoul
글 : 이선영
그래픽 디자인 : 장윤아 @ween_ya.7_7
사진 : 전병칠
번역 : 심지현 @silenciodelavida

Art Space 3 Director Sookhee Lee
Curator Joohee Park
Assistant Curator Jihyeon Sim

Text by Lee Sun Young
Graphic Design by Yuna Jang
Photography by Bungcheol Jeo
Translated by Jihyeon Sim
가까우면서도 먼 그녀

이선영(미술평론가)

이 전시에 참여한 4인의 작가들은 오랫동안 작업하며 살아왔던 여성들이라는 최소한의 공통점만 있다. 평소에 친한 사이도 아니고, 주된 매체도 다르다. 두루뭉실한 명칭이 된 설치가 공통점이라면 공통점일까. 설치는 회화에 대한 대안으로 등장했지만, 회화처럼 작가가 생각하는 것들을 담는 유연한 그릇이 되었다. 그럼에도 작품들이 연결되는 것은 작업하는 주체의 특성에 있을 것이다. 현대적 주체는 근대와 달리 확고하지 않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데카르트)라는 언명은 ‘나는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라깡)로 변화됐다. 이러한 극적인 역전은 ‘나’, ‘생각’, ‘존재’ 등, 뭐 하나 문제가 안되는 관념이 없었음을 말한다. 그러한 관념들은 오랫동안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심/ 주변의 관계는 특정 지역, 계층, 성이 연루되어있는 지배적 관념이며,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역사적 관념이다. 나 대신에 타자가, 생각 대신에 실천(실천이 너무 강하다면 실행이나 수행)이, 존재 대신에 과정이 들어섰다면, 이 전시의 작가들에게 조금이라도 유리한 국면이 펼쳐진 것이리라.
소박하고 조심스러운 듯한 그들의 어법은 단지 변방의 낮은 목소리가 아니라, 힘이 실리는 이유다. 자신을 강하게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은근하고 저력이 있다. 현대 철학의 사조를 따라 주체의 위상이 상대화된 점, 그에 따른 논리적 결과로 작가의 경험이나 삶을 배제하려는 동향도 있었다. 현대에 와서 형식, 언어, 코드 등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동위원소같은 개념들이 부각되었다. 19세기의 ‘예술을 위한 예술’만도 예술만을 위해 살겠다는 주체의 의지가 있는 것이다. 그러한 순수주의를 떠받혀주는 여러 실제적 맥락들은 무시되곤 했고, 이는 사회참여적인 예술이 비판하는 대목이다. 여성은 오랫동안 사회에 참여할 정도의 위치도 없었지만, 꾸준히 자기 목소리를 내면서 ‘순수주의’의 허구성을 말했다. ‘순수’가 가능한 주체는 분명히 남성이라는 성을 가졌음을 현실에서 체득했다. 여성의 순수는 라파엘전파 풍의 그림에 등장하는 ‘집안의 천사’나 군국주의에서 민족의 어머니 등으로 미화될 뿐이었다.

자기 몸속에 타자를 품고 상호작용하는 여성, 그에 상응하는 예술적 창조 모두는 ‘다른 것’과의 연결을 본질로 한다. 이 전시의 작품들은 자기 안의 타자부터 절대적 타자에 이르는 가깝고도 먼 타자들의 넓은 범위가 특징이다. 네 명의 작가 모두에게 드러나는 식물 이미지의 강세는 식물로 대표되는 자연의 그물망을 생각하게 한다. 자연 또한 오랫동안 타자였고, 이제 기후 위기 속에서 인간과 적대적인 상호작용으로 바짝 다가와 있다. 마이클 조던은 [초록 덮개]에서 최초의 인간, 즉 수렵채집자에게 자연의 모든 것은 살아있다고 말한다. ‘그는 자기 주변의 모든 것들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거대한 사슬의 일부이며 그 사슬을 통해 생명이 있는 것이든 없는 것이든 모든 대상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고 본다’ 그 연결은 유동적이며 예술가들의 식물은 토템처럼 ‘보이지 않는 존재의 외면적 상징’(마이클 조던)이다. 물론 이 다른 것은 작업하는 삶을 방해하는 요소들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순수주의가 불가능한 기획을 넘어 미학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텅 비워진 예술을 갱신하는 것은 또 다른 예술이 아니라 삶이다. 내용이 고갈되었을 때 형식을, 형식이 고갈되었을 때 내용을 살피는 것이 중요한데, 동종요법은 동어반복을 낳을 따름이다. 예술은 부재와 결핍으로 추동된다. 이 전시의 작품들은 작고 여린 것들에 대한 연민이 가득하며 이는 신화적 원형으로 소급되기도 하고 사회적 의식으로 고양되기도 한다. 물론 삶이 너무 가혹하다면 어떤 여지도 없다. 이 전시의 작가들은 국내외 유수한 대학에서 고등 교육을 받은 중산층 여성이다. 작품들에서 보이는 소박한 듯한 소재와 형식은 추후에 그들의 미학적, 삶의 지향에 의해 의식적으로 선택된 것이다. 하지만 계층이라는 조건은 작업을 지속하는데 다소간 편리한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예술의 핵심에도 있듯이 적절한 거리이다. ‘so near yet so far’라는 전시부제는 가까우면서도 먼 존재인 타자와의 관계를 암시한다.

강하면 부러지고 약하면 짓밟히는 역설 속에서 타자화된 이들이 작업을 지속하는 방식은 이 전시의 작품들에서 발견되는 섬유질 같은 끈질김이다. 식물 이미지는 현실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기념비적인 모습으로 서 있는 것이 아니라, 가느다란 지지대나 얇은 종이들, 악보, 헌 옷, 골판지나 슬픈 여인의 가슴팍에 등에 자리한다. 동물이 있기 전에 식물이 있었고, 자연은 식물로 대표되었다. 그리고 자연은 에코페미니즘의 주장처럼 여성으로 상징된다. 자크 브로스의 [식물의 역사와 신화]에 의하면, 산소를 배출함으로서 대기층, 다시 말해서 호흡할 수 있는 공기층을 형성하여 지구에 생명체가 살 수 있도록 했다. 그 자연은 오늘날 총체적인 위기에 처해있다. 자연이 모두 연결되어 있기에 위기도 총체적이다. 작가들은 나비효과 같은 작지만 큰 파장을 불러일으키려 한다. 그들은 가장 낮은 곳에 있는 타자들과의 대화적 상상력을 통해 위기의 시대에 필요한 것은 잔잔하면서도 끈질긴 실행임을 보여준다.


Carolyn Angus
세월에 바랜 듯한 누런 종이. 그 위에 목탄으로 그린 식물 이미지들은 모두 여신들 이름--[Medusa], [Pandora], [Penelope]--을 제목으로 한다. 신화적 여성에는 여성의 원형이 담겨 있다. 로버트 A 존슨이 쓴 [신화로 읽는 여성성 SHE]에 의하면 원형(archetype)은 ‘내면심리에 깔려 있는 전형적인 인간 행위의 잠재력’을 말한다. ‘광물 결정이 만들어질 때 결정축이나 체계를 볼 수는 없어도 모양과 특성을 이루는데 결정적 영향을 미치듯이, 인간의 행위도 어떤 기대된 패턴을 따른다’는 것이다. 작가에게 신화는 단순히 상상적인 옛 이야기 보다는 원형처럼 ‘집단적 상상력의 산물’이다. 신화는 ‘개인이 쓰거나 창조한 것이 아니라, 전 세대와 문화 전반에 걸친 집단적 경험과 상상력의 산물’(로버트 존슨)로,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개인을 넘어서 보다 보편적인 맥락에 놓고자 한다. 또한 그가 사용하는 목탄 또한 오래된 재료로서, ‘3억년 전의 석탄기 숲에서 얻는 굉장한 양의 석탄이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까지 전해졌다’(자크 브로스)는 것도 알려준다. 종이 또한 오래된 매체이다. 누런 색감이나 말끔하지 않은 외곽선, 선들이 겹쳐 보이는 얇은 재질 등은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가진다.
겹침의 효과는 자연 자체가 수많은 겹과 결을 가진 실재라는 것과 관련되고, 또 하나는 외곽선이 흐릿해지는 대신에 움직임의 환영이 담겨진다는 점이다. 매해 다시 잎을 내고 자라며, 지나가는 바람과 동물에 의지하여 자신의 씨앗을 퍼트리는 식물은 정지되어 있지 않다. 공포의 신화를 내장한 메두사는 촉수를 바짝 세운 듯한 모습이지만. 페넬로페와 판도라는 위아래의 구분이 없는 리좀적인 배치다. 리좀적 식물은 수목형보다 더 유연하다. 각각의 여신에 대한 이미지를 표현해서 벽에 붙이고 그 앞에 설치한 [Ghost Trees]는 2차원 이미지가 3차원으로 나온 듯한 효과가 있다. 채집된 식물같은 이미지는 금속제 지지대에 맞춰서 자신의 몸을 휘감는다. 종이 위에 식물을 그리고 올록볼록한 요철을 준 화면을 둥글게 배치하여 벽에 붙인 작품 [Where are you]는 매해 다시 시작되는 식물의 순환적 생태는 부활과 재생에 대한 관념을 인류에게 선사했음을 알려준다. 스코트랜드 출신의 캐롤린 앵거스는 그동안 돌, 쇠 등으로 설치 작업 많이 해왔지만, 나이가 먹어가면서 보다 유연한 재료로 이동했다. 하지만 이 전시의 작품에서도 보여지듯, 종이나 목탄은 외유내강의 재료이다.

박미화
박미화의 작품 [이름]은 죽은 이를 추모한 이들도 이미 죽었을 오래된 비문처럼 보인다. 벽에 세워진 합판의 열은 커터칼로 조각되어 가학적으로 다가오며, 닳고 닳은 표면은 시간의 시험을 이겨낼지 의문이다. 작가가 호명한 이름이나 명사, 동사는 잘 알아보기 힘들지만, 그들은 이미 이 세상 사람들은 아니며, 대부분 폭력의 희생자들로 보인다. 흐들흐들한 표면은 상처와 죽음, 그리고 망각을 암시한다. 유한한 생명이 갑작스러운 사건과 재난으로 끝나는 비극에 대한 작가의 애도이다. 하지만 이 서판들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무의식에 남아 표층으로 떠오르곤 한다. 박미화의 소재는 단순한 역사의 시대를 넘어 신화까지 소급된다. 종이에 목탄과 아크릴로 그린 작품 [선인장을 안고]에서 가시나무 관을 쓴 우울한 표정의 여성은 두 팔로 선인장을 가득 안고 있다. 지상의 아픔을 자기 것으로 힘껏 끌어안는 대지모신의 풍모이다. 식물 한가운데 자리한 소녀 이미지에 붙인 ‘횃불’이라는 제목은 다의적이다. 순수의 결정체일 아이는 하수상한 시국에 횃불을 든다. 하지만 불꽃 모양의 나뭇가지는 희생 또한 떠올린다. 세라믹이 포함된 가변 설치 작품 [낙화]는 그리듯이 조각하는 박미화의 어법을 잘 보여준다.
화가만큼 잘 그리지 못한다고 고백하는 그는 단점을 장점으로 변화시켰다. 도예적 질감에 실린 단순한 드로잉은 내부에 심어놓은 서사를 매우 설득력 있게 만드는 요소다. ‘소박하면서도 신화적’인 작품들은 약하고 여린 존재들에 대한 연민이 깔려있다. 이는 어머니의 정, 또는 근원적 모성성을 말한다. 그것은 정신분석에 자주 등장하는 ‘완전한 여성, 이상화된 어머니 상’이 아니다. 이러한 이상은 여성뿐 아니라 남성조차도 기만하는 관념이다. 캐롤린 앵거스가 서구의 신화를 바탕으로 은유의 어법을 구사한다면, 3, 4 등신 상으로 표현되는 박미화의 소녀상은 한국적이다. 박수근 미술상 수상자이기도 한 작가는 한국적 원형을 박수근 화백과 공유한다. 한국에도 신화는 있다. 하지만 작가는 특정 신을 호출하기보다는 신화의 정신과 접속한다. 앞서 인용한 [신화로 읽는 여성성 SHE]에 의하면 ‘신화는 그리스도교 신화가 탄생하기 훨씬 이전에 등장한 고대 신화이다. 오랜 구전 시기를 거쳐 나중에 문자로 정리’된 것으로, ‘근원적인 것일수록 직접적이고 단순하게 표현’된다. 박미화가 접속하는 근원적 모성성은 ‘보편적인 주제를 지니는 이야기들만 끝까지 살아남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모성은 신화이든 현실이든 ‘모든 사람에게 진실이라고 인정받는 내용’(로버트 존슨)인 것이다.

김주연
김주연의 [Hommage a Mother] 시리즈는 악보 위에 콜라주와 드로잉을 한 작품으로, 구순이 가까운 어머니에 대한 오마주이다. 반세기 가까웠을 어머니의 피아노 소리에 대한 기억을 풀었다. 악보 위에 콜라주하고 드로잉한 작품은 식물의 종자가 퍼트려지는 과정을 표현한다. 김주연의 잘 알려진 설치작품들은 종자가 발아하는 과정을 전시 현장에서 보여주곤 했다. 기억과 관련된 이번 작품에서 그 과정은 도해 된다. 식물의 자궁과 포자 등, 도감에 나올 듯한 분석적인 표현은 악보의 음표처럼 율동적이다. 생명의 탄생 과정에 율동이 있었다. 이후 율동은 우리의 맥박과 심장박동이 되었다. 생명에게 보이는 균형, 질서, 조화, 그리고 경이로움과 신기함, 생동감은 피아노로 연주될 수 있고, 이는 다시 미술작품으로도 번역될 수 있다. 그것들은 생명처럼 그물망처럼 엮여 있다. 누리끼리한 화면은 이러한 과정들이 격세유전적임을 알려준다. [Metamorphosis X]는 자라는 식물을 소재로 한 작품으로 잘 알려진 김주연의 키워드인 ‘변모’를 담았다. 식물과 변모는 밀접하다. 로베르 뒤마는 [나무의 철학]에서 ‘우리들의 눈앞에서 형상적 변이를 실현’하는 식물의 양태를 말한 바 있다. 김주연의 작품에서 변모는 삶과 죽음 모두에 걸쳐있다.
앵글 선반에 신문을 지층처럼 쌓고 이끼를 붙인 작품은 사회적 소통의 대명사였던 신문이 자연화되는 모습이다. 섬유질로부터 나온 종이는 소통의 매개체가 된 후 자연으로 돌아간다. 인간의 정체성을 알리는 문자들로 가득한 인쇄매체는 물질 덩어리로 변모한다. 썩어야 새로운 것이 나오고 그 반대도 진실이다. 그것은 인간사 역시 자연사의 일부임을 말하며, 단기적으로는 매체계의 급격한 변화 또한 은유한다. [존재의 가벼움] 시리즈는 설치작품을 사진으로도 남기는 김주연의 방식이다. 아이 옷에 심은 식물들은 일정기간 동안 자란다. 새순과 아이 옷의 조합은 밝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옷에서 자라는 것도 있고 시드는 것도 있기에 그의 작품은 그로테스크하다. ‘존재’는 묵직한 관념이지만, 뒤에 붙은 ‘가벼움’은 생명의 두 얼굴을 직시한다. [존재의 가벼움II]는 여성으로 상징되곤 하는 붉은색 옷 가장자리에서 자라는 식물은 여성과 식물의 가까움을 말한다. 시리즈 안에서 작품 속 옷 크기의 차이는 식물만큼이나 옷의 주인공도 자라고 있음을 암시한다. [존재의 가벼움III]은 성인 여성 외투의 실루엣에서 듬성듬성 패인 부분은 그것이 정점을 찍고 사그라드는 과정에 있음을 알려준다.

노원희
어머니의 시점으로 본 우리 사회의 어두운 모습이 있는 노원희의 작품은 부정적 현상에 대한 사회적 비난이나 논리적 비판을 뛰어넘어 관객의 마음을 먹먹하게 한다. 마음을 움직일 수 있어야 근본적 변화도 가능하다는 점에서 어머니의 시점은 효과적이다. 실제로 억울한 죽음을 맞이한 이들의 어머니들은 평범한 어머니에서 사회적 투사로 변하곤 한다. 사회는 그 누구도 아닌 피해 당사자의 어머니 목소리를 결코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자식을 잘 키워낸 어머니는 양면적 존재다. 낸시 초도로우의 [모성의 재생산 The Reproduction of Mothering]에 의하면, ‘여성의 어머니 노릇의 재생산은 가정영역 내에서 여성의 위치와 책임을 재생산하는 기초’로, 아내와 어머니인 여성은 남자 노동자를 육체적으로 심리적으로 매일 재생산하고, 다음 세대를 재생산하는데 기여하고, 그래서 자본주의 생산의 재생에 기여해왔다. ‘노동의 성별분업과 여성의 아이 돌보기 책임은 남성 지배와 연결되고 남성 지배를’(낸시 초도로우) 낳아왔던 것이다. 모성은 여성을 위대하게도 하고 발목을 잡기도 했다. 급격한 성장으로 물질/정신의 괴리가 심한 한국 사회에서 여성은 이제 출산파업까지 감행하는 파국에 이르렀다. 가부장적 기준에 의한 보수적 어머니를 수정한 것은 사회에 참여하기 시작한 여성들이었다.
보자기 천에 이미지 아이콘과 기호를 활용한 시리즈는 자식을 앞세운 어머니의 눈물을 닦고, 머리띠로 두르고, 때로 깃발로 휘날릴 수 있는 천을 생각나게 한다. 시리즈로 제작된 [말 없는 존재]는 84x84~89x89cm 크기의 천 보자기에 아크릴, 칼라펜 등을 이용하여 작업했다. 얼마 전 홍수 피해 지역의 수색 작업 중 익사한 해병 사건이 국가에 의해서 체계적으로 왜곡되어 국민적 분노를 야기한 바 있다. 특히 ‘VIP의 격노’로 촉발된 국가 수뇌부의 조직적 은폐 과정은 국가 시스템의 자의성에 짓밟힌 국민의 권리를 고발한다. 노원희는 진실을 밝히려는 이들과 감추려는 이들의 공방전을 떠올리는 이미지들을 천 위에 그려 전시장에 설치했다. ‘희생자의 가상심리’를 통해 큰 파장을 일으킨 사회적 사건을 상상적으로 표현했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권력 뒤에 숨은 자도 말이 없다. 캔버스에 아크릴로 그린 [조선소 사고 후에]는 ‘산업재해 피해 이후 운동 부족으로 극도로 비만해진 노동자의 모습’을 담았다. 1980년대 [현실과 발언] 그룹의 일원으로 민중을 주제로 작업을 해온 작가에게 2024년 현재의 현실 속 민초들은 어떤 모습일까, 그것은 진보마저도 유행을 타는 세태와 무관한 작가의 여전한 화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