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철 개인전

Choi Sangchul Solo Exhibition

ARTIST
최 상 철 
Choi, Sang Chul
TITLE
최 상 철 개인전
DATE
2021. 10. 28 (Thu) - 12. 11 (Sat)
OPENING RECE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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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아닌 것을 에워싼 숨결
“진정한 시는 말하면서 닫아 버리는 말, 말의 폐쇄된 공간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시인이 공간을 키우고 리듬에 맞춰 사라지기 위해 스스로를 소진하는 숨 쉬는 내밀성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에워싼 내면의 순수한 화상(火傷)”
- 모리스 블랑쇼 (『문학의 공간』, 2011, 그린비, 207쪽)


“토로록 틱 티딕 톡, 톡.” 각진 곳 하나 없는 매끈한 작은 돌멩이 한 개가 화면 위에서 튕겨 구르기를 반복한다. 고요한 작업실을 채우는 건 의미를 알 수 없는 소리뿐이다. 언제쯤 돌 구르기가 끝날지 알 수 없다. 최상철은 손안에 들어오는 제각각인 크기의 자갈 중 하나를 선택하여 검정 아크릴 물감에 적신 후, 캔버스 위에서 이처럼 굴리기를 반복한다. 굴리기를 위하여 캔버스 측면에 손잡이 역할을 겸한 틀이 덧대어진다. 돌 구르기가 멈추는 때는 자신의 몸에 묻은 물감이 완전히 사라질 때이다. 이 과정을 그만의 미학적 형식으로 부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예술을 빌미로 한 놀이라 불러도 될 것이다. 여하튼 이와 같은 비정형적인 작업 과정을 거쳐 화면 안에는 그만의 시간과 공간이 피어난다. 돌이 굴러가는 시간만큼의 흔적과 그 움직임을 그대로 받아들인 얼룩의 변증법은 작가가 작업을 통하여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어렴풋이 떠오르게 한다. 비유해보자면, 자연의 시간, 그러니까 해가 뜨고 지고, 달이 뜨고 지는 절대적인 시간 안에서 구르는 돌은 상대적인 시공간을 창조한다. 한 작품당 한 개의 돌을 사용하여 천 번의 구르기가 끝나면 작업도 완성된다. 천 번이라는 숫자가 특별히 마음을 건들지만, 그 역시 인위적인 사유의 한계가 만들어낸 상징일 뿐이다. 아마도 작가에게 천 번이란 횟수는 작업을 멈추기에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숫자가 아닐까. 요컨대 작가는 숫자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고 한다. 의미에서 벗어나는 게 어쩌면 작업을 하는 이유 중 하나일 터. 우연의 법칙에 따라 나타나는 예측 불가능한 세계를 환대하는 것이야말로 미학적 충돌이 발생하는 순간일 것이다.

캔버스 위에 물감이 묻은 돌을 놓는 순간부터 작업이 시작된다. 캔버스를 움직여서 돌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운동성을 받으려면 작가의 몸에 비례하여 화면의 크기가 결정된다. 최상철은 주어진 회화의 형식을 자신의 몸에 맞춰 재편한다. 중요한 건 바로 모든 작업이 그의 몸에서 비롯된다는 점이다. 근대미술의 실험은 캔버스의 크기와 물성도 회화를 구성하는 주요한 요소이자 담론으로 확장시켰다. 한국 현대미술에서 작가의 몸과 회화의 관계를 다룬 사례는 흔치 않다. 오히려 작가의 자아를 부풀려 작업의 규모를 키운 경우는 빈번했던 편이다. 워낙에 탈형식적 측면이 강하기에 캔버스와 신체의 관계는 비교적 덜 드러나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미니멀리즘 미술이 공간과 신체의 관계를 탐구한 것처럼 그의 예술세계를 풍부하게 관측할 수 있는 또 다른 가능성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자 다시 그의 작업 방식으로 되돌아가 보자. 그렇게 캔버스의 크기가 결정되면 곧 놀이가 시작될 것이다. 그는 우연의 법칙을 따른다. 이것은 매우 단순하고 직관적으로 이루어진 법칙으로 언어적 설명이나 의미를 벗어난 작가의 태도를 보여주는 지점이다. 즉 최상철의 회화는 무엇을 말하지도 어떤 대상을 지시하지도, 그렇다고 의미를 내포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회화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나아가 무엇을 보여주어야 하는 가라는 물음이 뒤따른다. 이러한 미학적 질문은 근대 이후 예술이 당면했던 문제였고, 가상과 현실 사이에서 길을 찾고 있는 동시대 미술의 고민이기도 하다. 예술을 표현하는 언어를 포기하려는 결심은 단지 언어를 버린다는 결정론적 행위가 아니라 과연 언어가 무엇인지를 되짚어보자는 반성의 요구와 맞닿아 있다. 파울 클레는 놀이를 통하여 그림의 원형을 되찾았고, 존 케이지는 음악 이전에 이미 존재하는 소리의 가치를 제시했으며, 아그네스 마틴의 선 긋기는 깊이에의 욕망을 버리고 오로지 평면 안에서 수직과 수평의 기하학적 관계로 세계를 사유했다. 이러한 예술의 실험들이 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미술이 세계의 모방에서 벗어나 존재라는 본질을 탐구하라는 요청이었다.

20세기 중반 추상 모더니즘은 근대 세계의 붕괴와 접합 사이에서 출현했다. 한국의 모더니즘 미술 역시 냉전 시대의 이념 안에서 동서양의 정신과 물질, 양식과 이념의 혼합물로 형성되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은 숭고한 한 시대를 대표하는 기념비적 양식이 되고 말았다. 한편 최상철은 화단의 경향과 거리를 두고 자신이 선택한 묵음의 세계에 몰두한다. 그림이 되기보다 그림의 틀에서 벗어나기를 반복하면서 어떤 가시적 해석이나 형상에의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는 작업 방식을 거듭 고안한다. 그의 작업 방식을 두고 구도자적 혹은 수행적이라는 상투적인 수식은 낡은 의미를 재생산할 뿐이다. 아마도 작가는 이러한 수식을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예술을 하는 이유가 깨달음을 찾기 위한 구도자적 수행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오히려 사유의 바깥을 향하고 있다. 사유의 바깥이란 언어의 바깥이자 언어로 묘사될 수 있는 세계를 벗어나려는 실천이다. 즉 그에게 회화는 시를 짓는 것과 다르지 않다. 주지하다시피, 시는 형식이 아닌 사유의 방식이다. 따라서 그는 사유를 위하여 그리기의 형식을 벗어낸 채로 그리기를 반복한다. 그렇게 미메시스가 재연될 수 있는 고리를 봉쇄해버린다. 들뢰즈(G. Deleuze)의 개념을 빌리자면 완전한 탈주선(flying line)을 그리는 중이라 부를 수 있겠다.

조르주 바타유(Georges Bataille)는 인류의 진화 과정을 생존에서 놀이로, 노동에서 예술로 변한다고 보았다. 구석기시대에 등장한 호모 파베르, 즉 도구를 만들 수 있는 존재는 생존을 위해 돌로 필요한 도구를 발명했다. 기후가 온화해지면서 생존의 도구는 그림을 그리는 예술적 도구로 전환된다. 생존이 우선되는 시대를 벗어나자 생각하는 인간은 이미지를 통하여 주술적 의미를 담은 그림 놀이를 시작한 것이다. “이제 평온해진 인간의 활동은 곧장 노동으로만 연결되지는 않게 되었다. 바로 이때부터 예술 활동이 더해졌다. 생존에 유용한 활동만 있던 터에 놀이라는 활동이 더해진 것이다.”(조르주 바타유, 『라스코 혹은 예술의 탄생/마네, 워크룸프레스, 2017, 51쪽) 알다시피 놀이는 쓸모와 무관하게 기쁨을 목적한다. 바타유는 더 나아가 언어가 만들어지면서 노동과 도구 사이에 존재하는 감각적인 측면이 사라졌다고 해석한다. 즉 언어에 의하여 대상/사물이 가진 감각적인 면을 없애는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바타유는 이처럼 감각적인 것의 상실이 예술의 필요성을 끌어낸다고 보았다. 바타유가 사유한 예술의 존재 이유는, 무엇보다 언어 너머의 세계, 의식을 벗어난 감각적 자율성을 되찾는 시적 세계와 조우한다. 한편 프랑스 철학자 모리스 블랑쇼(Maurice Blanchot)는 시를 “열린 세계”라 명시했다. 열린 세계는 무엇을 바라는 공간이 아니다. 오로지 가장 내면적인 것을 향한 순수한 소비가 일어나는 공간이다. 존재는 소진되는 것이며, 그것이 또한 존재의 본질이란 건 그 누구도 모를 수 없는 진리이다. 그러나 세계는 인간을 존재로 보기보다 사회적 기준으로 판단한다. 그렇게 존재의 바탕은 현실에서 지워지고 만다. 그러므로 예술이라는 시적 세계는 말의 자율성을 요청한다. 내밀한 존재 자체에 다가가는 것이 곧 시인의 활동, 예술가의 실천이 아니겠는가. 관습과 의식으로 굳어진 언어가 아닌 자신만의 말을 찾아가는 길이 곧 예술을 실천하는 방식이다. 최상철에게 작업은 존재의 순수한 소비에 다가가는 과정이다. 끝으로 그렇다면 완전한 추상에 도달하는 게 가능할까 질문해 본다. 최상철의 작업 방식은 순수한 소비, 놀이로서의 예술을 실천하는 하나의 미학적 방법으로 보아야 한다. 완벽한 추상은 작업의 목적일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구상과 추상의 구분 이전에 박영택이 말한 것처럼, 가장 자연에 가까운, 인위적이지 않은 미술의 원형성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연의 법칙은 때로는 어떤 형상을 연상시키거나 비유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번 전시에 소개된 몇 작품(“無物 21-6”, “無物 21-7”, “無物 21-8”)은 자연의 형상을 떠올리게 한다. 자연을 닮거나 그것을 연상시키는 형상들도 결국 우연의 결과이다. 요컨대 최상철의 회화는 작가에 의하여 완전히 통제된 세계가 아니라 작가와 작업, 행위와 결과가 자율적인 관계를 맺는 세계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무엇보다 감상과 해석 또한 오로지 보는 이의 몫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작품은 작가의 이름이 사라진 익명의 것이 되어 공통의 것이 될 수 있다. 저자성 또는 작가의 의도를 벗어나 작품을 감각하는 자율성은 모두에게 주어진 권리이기 때문이다.

정현(미술비평, 인하대)
Breaths Around Nothing(ENG)
“Then the true poem is no longer the word that captures, the closed space of the telling words, but the breathing intimacy whereby the poet consumes himself in order to augment space and dissipates himself rhythmically: a pure inner burning around nothing.”

- Maurice Blanchot The Space of Literature (1982)

"Thump, thunk, thump." A smooth stone without any angled edges repeatedly bounces and rolls back and forth on the canvas. Only unknown, meaningless sounds fill the studio. Nobody knows when the stone will stop rolling. Choi Sangchul chooses one of the different sizes of stones that can be held in his fist, dips it in black acrylic paint and repeatedly rolls it on the canvas like this. For rolling, the frame that also serves as handles is added on the sides of the canvas. The stone stops rolling around when it's no longer covered with paint. This process could be called the artist's own aesthetic form, but rather, it could be called play under the guise of art. Nevertheless, through such an atypical work process, his own time and space bloom on the canvas. The dialectic of the smudge that accepts the stone's traces while it's rolling and its movement as such, vaguely reminds us what the artist wants to obtain through his work. In comparison, the rolling stone in the time of nature, that is, the absolute time when the sun rises and sets, and the moon appears and fades away, creates relative time and space. One work takes one stone and when a thousand times of rolling is over, the work is completed. The number 1,000 is particularly on our minds, but it is merely a symbol created by the limitations of artificial thinking. For the artist, a thousand times is probably a just number that is neither insufficient nor excessive to finish the work. In short, the artist does not give meaning to numbers. Perhaps escaping meaning is one of the reasons for his work. Welcoming the unpredictable world that follows the law of chance will be the moment of aesthetic impact.


The work begins the moment he places a paint-covered stone on the canvas. The size of the canvas is determined in proportion to the artist's body to permit the best mobility, allowing the stone to draw by moving on the canvas. Choi Sangchul restructures the given format of a painting to suit his body. What's most crucial is that all the work comes from his body. The experiment of modern art also expanded the discourse that the size and characteristics of the canvas are the main elements of painting as well. There are few cases in Korean contemporary art that deal with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artist's body and painting. On the contrary, it was often the case that the artist's ego was inflated to build up the work. It is true that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canvas and the body is relatively less noticeable because the formless aspect strongly stands out. However, just as minimalist art explored the relationship between space and the body, we should take into account another possibility to observe his art world abundantly. Now let's get back to how he works. Once the size of the canvas is determined, play will soon begin. He follows the law of chance. This is a very elementary and intuitive law that displays the artist's attitude beyond linguistic explanations or meanings. In other words, Choi Sangchul's paintings don't say anything, indicate any objects, nor imply any meaning. Then, questions regarding what paintings should be, and furthermore, what paintings should show, can follow. These aesthetic questions have been a problem post-modern art has faced, and also cause concerns of contemporary art seeking a method between virtual and reality. The resolve to give up the language that expresses art is not just a deterministic act of abandoning the language, but is an extension of the demand to reflect on the purpose of language itself. Paul Klee rediscovered the original form of painting through play. John Cage spotlighted the value of sound that already existed before music. Agnes Martin abandoned her desire for depth and thought of the world exclusively in a vertical and horizontal geometric relationship on a plane through drawing lines. What are these art experiments seeking? They are urging us to explore the essence of art beyond imitation of the world.


Mid-20th century abstract modernism emerged between the collapse and junction of the modern world. Modernism art in Korea was also formed out of a mixture of the ideology, style, substance and spirit of the East and the West within the ideology of the Cold War era, but over time it became a monumental style representing a noble era. Meanwhile, Choi Sangchul devotes himself to the world of silence he chose, distancing himself from the tendency of the art circles. He constantly devises a way of working that is not obsessed with desire for figure or certain visual interpretation, repeating getting away from the frame to be a picture rather than becoming a picture. Describing his way of working as practicing asceticism or seeking the truth is just another cliché reproducing outdated meanings. Perhaps the artist will not be pleased with this expression because he is not creating art to practice asceticism to achieve enlightenment. He is rather going for the thoughts from outside. It is the language from outside and the practice to try to get out of the world that can be depicted in language. That is, there is no difference between painting and writing a poem to him. It's well-known that poetry is not about a form but about a way of thinking. Therefore, for thinking he keeps painting regardless of form. That's how he blocks the chain where mimesis can be reconstructed. According to Deleuze, it could be said that he is drawing a line of flight.

Georges Bataille presented the evolution of humankind as transformation from survival to game, work and then art. Homo Faber, a man who could make tools in the old Stone Age, invented necessary tools out of stones to survive. As the climate gets milder, tools for survival transform to artistic tools to draw. Getting out of the era when survival was the number one priority, humans started a drawing game, containing a magical meaning through images. "Humans whose lives became more peaceful started activities that were not directly linked to work. From this point on, artistic activities were added. The activity called play was added to where only activities useful for survival existed" (George Bataille, Lascaux or the Birth of Art). As you know, play pursues joy regardless of its usefulness. Furthermore, Bataille interprets that the sensory aspects existing between work and tools disappeared as language was being created. In other words, a phenomenon that the sensuous aspect of an object was removed by language took place. Bataille considered that such loss of sensuous matter triggers the need for art. What Bataille thought of as the reason for the existence of art was encounters the world beyond language and the poetic world that regains sensory autonomy beyond consciousness above all. Meanwhile, French philosopher Maurice Blanchot specified poetry as "the open world." The open world is not the place to want something. It's where pure consumption of inner elements happens. Being is exhausted, and everybody knows the truth that this exhaustion is the essence of being. However, the world doesn't consider humans as being, but rather, judges them by social standards. Thus, the basis of being is erased from reality. Therefore, the poetic world of art requests the autonomy of speech. Isn't approaching the very intimate being a poet's activities, that is, an artist's practice? The way to find their own words instead of a language fixed by customs and consciousness is the way to practice art. To Choi Sangchul, work is the process where he approaches the pure consumption of being. Finally, if so, we ask if it is possible to reach a complete abstract. Choi Sangchul's way of working should be counted as an aesthetic method of practicing art as pure consumption and play. Complete abstraction can not be the purpose of work. The important point is to pursue the original form of art, before the distinction between conception and abstraction, that is inartificial, closest to nature like Park Youngtak addressed. Nevertheless, however, the law of chance sometimes seems to be a metaphor or brings up the image of a certain shape. Several works introduced in this exhibition (Mumool 21-6, Mumool 21-7, and Mumool 21-8) remind us of the shape of nature. Shapes that resemble nature or reminiscent of it are eventually a result of coincidence. In short, we have to remember that Choi's paintings are not a completely controlled world, but a world where artists and work or action and results form an autonomous relationship. Above all, appreciation and interpretations should completely be up to those who look at the works. By doing so, the art belongs to nobody with the artist's name removed, and finally belongs to everybody. That's because the autonomy to sense works regardless of the writer's or artist's intention is a right given to everyone.

Jung Hyun (Art criticism, Inha University)


1,000번의 궤적
박겸숙(PARK KYUM SOOK, / 아트노이드178 대표)

작가는 작은 울림에 집중한다. 그것은 검은 물감을 묻힌 돌이 팽팽하게 당겨진 캔버스 위를 구르며 내는 소리이다. 캔버스 천의 탄성과 돌의 무게가 만들어 낸 미세한 떨림이 파장을 일으킨다. 캔버스를 잡은 작가의 두 손에 울림이 전해진다. 구르는 둥근 돌의 표면은 독특한 궤적을 남기며 캔버스의 테두리로 향한다. 캔버스에 둘러쳐진 나무판자에 돌이 부딪힌다. 툭, 툭, 둔탁한 소리가 난다. 캔버스 밖을 향해 탈주하려던 돌이 방향을 바꾸어 다시 캔버스 안쪽으로 돌아온다. 점점 움직임이 느려진 돌이 캔버스 위에서 그 움직임을 멈춘다. 그렇게 천 번. 작가와 조응하던 울림이 잦아든다. 돌은 마지막 흔적을 남긴다. 그리고 작품은 완성된다.

1,000번의 궤적
작가 최상철은 ‘그리지 않음으로 그림을 완성한다’. 일종의 역설과도 같은 이 말은 천 번의 궤적이 만들어낸 작품에 대한 가장 완벽한 설명이다. 작가는 어떠한 인위적인 더함이 없는 “있는 그대로의 결과”를 마주하기 위한 방법을 탐구해왔다. 그가 끊임없이 시도해온 결과물이 바로 작품 <무물(無物, Mumool)>이다.
작가는 화면에 자신의 의도에 따라 만들어지는 어떠한 작위적인 테크닉 일체를 배제하면서, 작품에서 작가의 존재를 지우길 원했다. 그는 손과 붓으로 어떠한 형상도 그리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어떤 것-‘돌’-의 흔적일 뿐이다. 작가는 돌을 캔버스에 올려놓을 때, 최소한의 개입만을 스스로에게 허용한다. 심지어 그는 작품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끝내는 순간까지 스스로 주도적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작가는 자신의 내적 욕망을 엄격하게 배제하기 위해 모든 요소를 사전에 기획한다. 고무 패킹을 던져서 돌이 구르기 시작할 위치와 방향을 정하거나, 양 끝에 ‘좌(左)’, ‘우(右)’라고 쓰인 작은 스틱을 던져서 돌이 캔버스의 어느 쪽에서 구르기 시작할지를 결정한다. 작품을 완성하는 순간은 정해져 있다. 유일하게 작가가 결정한 것이지만, 그 조차도 임의적이다. 천 번째에 끝낸다. 이 1,000이라는 숫자에는 종교적으로도 철학적으로도 다양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수많은 전거(典據)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작가는 여기에 어떤 개념에 의존하거나, 의도적으로 가치를 부여하려 하지 않는다.
이렇게 수십 년간, 작가 최상철은 조형적 논리를 세우는 주체로서의 권위나 작가에게 부여되는 모든 특권을 내려놓고자 부단한 노력을 해왔다. 그 결과 그리는 행위를 통해 대상을 재현하고 의도를 표현하는 ‘모방과 장식’에 대한 일체의 관습들이 작품에서 제거되었다. 더 잘 그리고 싶은 끝없는 욕망이 들어설 자리도 줄여가고자 했다. 이처럼 그에게 회화는 더 이상 어떤 재현이나, 표현이라는 수단을 통해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와 가치를 담아내는 수단이 아니다.
이제 우리는 회화의 존재 이유를 그 근원으로부터 다시 물어야 한다.

최초의 그림으로의 귀환 : 무물(無物)
회화는 “꾸미지 않은 진정한 세계”를 드러내기 위해 존재한다. 다시 말해 언어와 의미로 고정되기 이전의 상태, 언어와 형상으로 포착될 수 없는 ‘그 무엇’이 스스로를 드러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존재해야 한다. 왜냐하면, 아직 형태를 갖추기 이전이기에 우리 눈앞에 드러날 수 없는 무분별적 세계와 맞닿은 곳에서 회화는 발원하기 때문이다. 회화는 ‘무언가를 드러냄’으로써 동시에 ‘드러나지 않음’을 함께 보여준다. 이때 ‘드러나지 않음’은 ‘없음(Nothing, 無)’이 아니라, 함께 있으나 ‘아직-드러나지 않은’ 것이다. 즉 ‘없음-존재(無物)’인 것이다.
작가가 작품의 제목으로 명명한 <무물>은, “모든 것이 뒤죽박죽 혼돈인 상태”를 묘사하는 상징적 표현으로 사용된다. 그것은 무차별적이고, 무제한적인 잠재성으로 가득 찬 시공간이다. 그것은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가능성으로 충만하다. 그것은 주객이 분리되기 이전의 세계로, 원초적 감각들이 존재하는 세계다. ‘아직 드러나지 않은’ 상태의 것들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순간은 경이롭다. 시원(始原)에서의 회화(예술)는 자신의 질서에 따라, 비가시적인 것들을 가시화한다. 최초의 그림은 ‘스스로 자신을 드러냄’으로서, 우리 앞에 펼쳐진다.
작가는 그것은 “아마도 아주 오래 전에 누군가가 나뭇가지를 집어들고, 바닥에 무심히 그었던 선(線)과 같은 흔적일 것”이라고 말한다. 최초의 그림은 그림을 잘 그리려는 욕망이나 심지어 그림에 대한 개념조차 없이 그려졌을 것이다. 그는 최초의 그림을 그리던 세상을 다시 만나길 열망한다. 지금 우리는 그 최초의 그림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서 작가는 그림을 그리지 않고도 그림을 그리는 방법을 끊임없이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는 자연의 충일함과 평온함에 이끌린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상태에서 남겨진 궤적들이 조화롭게 자리하는 그 경이로운 순간을 예감하며, 그는 그리기 ‘이전의 흔적’들을 받아들인다.

입구
작가 최상철이 지향하는 것은 인위적으로 포착하고 드러내려 할수록 멀어진다. 그렇기에 작가는 더더욱 자신의 개입을 덜어내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해왔다. 그는 자신의 욕심을 덜어내고 비우고자 하는 그 자체에 대해서도 경계한다. “탐욕에서 벗어나기 위해 더 많은 욕심을 불러오는 것은 아닐까.” 그는 이것 마저도 욕구의 또 다른 형태가 아닐지 자문한다. 그는 이렇게 최선을 다해 주체를 부정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며, 진정한 세계를 드러내기 위한 방법을 끈질기게 모색해왔다. 자신이 새로운 방법에 익숙해져서 무뎌지지 않도록, 그는 쉼없이 다시 새로운 방법을 찾아낸다. 그렇게 그는 ‘아직 어떠한 형태로도 고정되지 않은 그것’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을 묵묵히 기다린다.
우리는 작가 최상철의 곁에 서서, 그가 바라보는 ‘그 무엇’을 함께 본다. 그는 절대로 스스로를 기만하는 방식으로 우리 눈앞에 그것들을 펼쳐내지 않는다. ‘스스로 그렇게 존재하는 것’들이 만들어 내는 울림들을 느끼며, 그는 그 흔적들을 따라 여기까지 왔다. 그것은 나직한 울림이 시작된 그곳으로 그를 이끌었다. 우리는 작가 최상철이 자신의 욕망을 내려놓고 기꺼이 이 모든 것과 조응하며 도달한 그 문 앞에 함께 서 있다.
A Thousand Trajectories(ENG)
PARK KYUM SOOK / Representative at artnoid178

The artist concentrates on a small echo. It is the sound of a stone coated with black paint rolling across a tightly pulled canvas. The elasticity of the canvas material and the fine vibrations created by the weight of the stone cause resonance. They resonate to the artist's hands holding the canvas. The surface of the round rolling stone approaches the rim of the canvas, leaving a unique pathway. The stone comes in contact with a wooden board surrounding the canvas. It makes a dull thumping sound. It tries to escape toward the outside of the canvas, but changes direction and returns to the inside. As it gradually slows down, the stone stops moving on the canvas. Just like that, a thousand times over. The coordinated echoes with the artist subside. The stone leaves its last trace, and the work is finished.

A thousand Trajectories
Artist Choi Sangchul “completes a drawing by not drawing”. This paradox-like phrase is the most perfect explanation for the work created by a thousand trajectories. The artist has contextualized ways to face “the consequences as they are” without any unnatural additions. The result of this constant attempt is revealed in his work Mumool (Nothingness).
The artist wants to erase the existence of himself from the artwork, excluding any artificial sets of techniques made by his own intention. He does not draw any features with his hands or brushes. The art is simply a trace of something, like a stone. The artist lets himself in to the minimum when he places a stone on a canvas. Furthermore, he does not take the lead in his work from the very beginning to the end. To exclude his own inner desires as strictly as possible, the artist plans all the elements in advance. Throwing a piece of rubber decides where the stone starts to roll and its direction. Throwing a small stick with “left (左)” and “right (右)” at each end decides which side of the canvas the stone starts rolling from. The completion moment of the work is set already. This is the only part the artist decides, but it's just a random number. It completes when it fills one thousand times. There are numerous foundations in the number 1,000 that can give various meanings both culturally and philosophically. However, he is not trying to rely on certain notions or intentionally assign a value.
For decades, Artist Choi Sangchul has made continuous efforts to set aside his authority as the subject of establishing formative logic or any similar privilege granted to the artist. As a result, all customs of “mimesis and decoration” that reproduce objects or reveal intentions through the act of drawing were extracted from the work. He also tried to minimize the place for an ongoing desire to draw better. As such, for him, painting is no longer a process of capturing the meaning and value that the artist hopes to communicate through its representation or expression.
Now we have to ask for the reason for the existence of painting from its source.

Return to Its Original Painting: Mumool
Painting exists to reveal “the real world that is not modified”. In other words, it must exist to help “something” that is in a state before it is fixed in language and meaning and cannot be captured in language or shape to reveal itself. This is because painting originates in contact with the unidentified world that cannot be revealed in front of us because it has not yet taken any shape. Painting demonstrates “not revealing” at the same time by “revealing something”. “Not revealing” is not “nothing” here, but rather “not revealed yet”, even though they are together. In other words, it is "nothing-existence."
Mumool, named by the artist as the title of the work, is used as a symbolic expression to describe “a state in which everything is mixed up”. It is a time and space full of indiscriminate, unlimited potential. It has full potential to be anything. It is a world where primitive senses exist, before the subject and object were separated. The moment when things that “have not yet been revealed” reveal themselves is astonishing. Painting, at the outset, visualizes invisible details according to its order. The first painting unfolds in front of us as “exposing itself”.
The artist says, “It is probably something that started a very long time ago, like a line trace drawn inattentively on the floor with a stick”. The very first drawing was drawn like that without any desire to draw well or even without the concept of drawing. The artist is eager to encounter the world where the first picture was drawn. Can we find the first drawing again at the moment? That might be the reason the artist is constantly searching for a way to create a picture without actually drawing.
He is attracted to the tranquility and abundance of nature. Hoping to find that wonderful moment when those traces left in a very natural state are in great harmony, he accepts “traces before drawing”.
The more you try to artificially capture and unearth Choi's intention, the further away it gets. Therefore, the artist has made constant efforts to remove his interference. He is even wary of minimizing and emptying his desire itself. “Am I getting more greedy by focusing on removing greed?” He asks himself if this might be another form of desire. He has been constantly doing his best to deny his subjecthood and persistently seeking ways to reveal the true world. In order to avoid getting used to the new method and becoming dull, he constantly finds new ways again. Just like that, he silently waits for the moment when “something that has not yet been fixed in any form” appears.
We stand next to the artist Choi Sangchul and watch “something” he sees together. He never spreads them out before our eyes in a way that deceives himself. Feeling the resonances created by “things that exist by themselves in that state”, he arrived all the way here by following the traces. It led him back to the place where the low resonance began. We now stand together at the door where the artist has willingly conformed to all of this, laying down his own desires to come.   Double Click to Edit